지난번 게임 파티 정모는 내게 하나의 도전이자 작은 기적과도 같았다. 세상 밖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고통스럽거나 지옥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모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고, 낯선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래도 무사히 그 시간을 버텨냈다는 안도감과, 의외의 즐거움이 주는 작은 성취감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특히 나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 정모에 나오도록 기회를 주었던 그녀의 행동, 그 의도는 나는 잘 모르지만, 거절할 수 없었던 그녀의 배려로 이 어둠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이 굳게 닫혔던 내 마음이 세상과 아직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정모가 끝난 후, 우리는 단체 채팅방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나눴다. 그때, 그녀가 내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취미 클래스' 같이 들어볼래요? 아까 얘기하다가 생각난건데…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까 했던 이야기?' 순간 우리가 했던 이야기 중 어떤 관심사를 얘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취미 클래스'라니, 어떤 건지 물어보기는 상대방에게 상당히 민폐라고 느꼈다. 그렇다고 수락하기에는 내게 너무나 낯설고 새로운 영역이었다.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게임말고는 딱히 없는 내게 취미 클래스는 또 다른 도전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그 문장이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단순히 혼자 가기 싫어서 내뱉은 말일지라도, 나는 그 말에서 나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따뜻한 권유를 느꼈다. 어쩌면 그 손길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내 오랜 무기력을 깨뜨리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구와 맞물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채 '관심 있어요'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만날 날짜와 함께, 근처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게임이 아니라 정말 새로운 환경인데…'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난 정모는 그래도 오랫동안 게임에서 소통했던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취미 클래스는 새로운 활동과 함께 아직은 어색한 그녀와의 동행으로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방 안으로 숨어들어 컴퓨터 화면 속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시달렸다. '내가 실수하면 어쩌지? 또 다른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불안감은 끊임없이 나를 잠식해 들어왔다.
하지만 게임 속으로 도망간다고 그녀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같은 파티에, 추가된 친구 등록. 게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미 잡은 약속을 취소하기에는 내겐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고 세상과 연결 시켜줄려고 했던 일이 언제가 마지막이였을까?' 지난날 부모님의 간섭으로 뭉개진 나의 자아가 스스로 움츠러들려는 내게 아주 미약한 기회를 불어넣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 나의 불안을 조금 낮추어 주었다. 그리고 이 기회가 다음에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나의 삶은 바닥을 찍었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한 번 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지금 이 우울한 방 안에서 멈춰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주 단순하게도 더 이상 세상과 단절된 내 모습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취미 클래스 당일, 나는 지난번 정모 때보다 훨씬 더 긴장했다. 지난번에는 적어도 '게임'이라는 주제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모른채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약속 장소는 번화가 사거리에 위치한 카페 앞이였다. 그녀가 편한 복장을 권하길래, 저번과 마찬가지로 츄리닝과 후드티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약속 시간에 맞춰 카페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신호등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바라본 세상은 다양한 색들로 이루어진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바라본 사람들의 표정은 한 가지 색으로만 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건드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녀였다. 반가운 인사를 건낸 그녀와 함께 활동 장소로 이동했다.
10분 정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외각에 자리 잡은 입구가 어딘지도 모르겠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간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몇 번을 두리번거린 끝에 겨우 입구를 찾아냈다. 사람이 한명 올라갈만한 좁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는 동안, 내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탐험가처럼, 혹은 마지막 재판을 앞둔 죄인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 층을 올라가니 그녀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설렘과 긴장이 섞인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짧은 순간이였다. 계단을 다 올라서자, 유리문 너머로 밝은 조명과 함께 벽면에 여러가지 색상이 있는 알 수 없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이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하는 마지막 망설임이 나를 덮쳤다. 다시 뒤돌아 방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리번 거리더니, 확신이 들었는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뒷 모습이 마치 앞으로의 세상을 소개해주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빨려드러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무거웠던 발걸음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칸 한 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그 한 걸음은 세상에 나와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발걸음이 아니라, 그동안 멈춰 있었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사실, 나는 그 어떤 것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권해준 기회를 통해 그동안 내가 품어왔던 두려움들이 사실은 거대한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단 한 번의 용기 있는 시도가 이렇게 큰 변화의 물꼬를 틀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방 밖으로 나온다는 것,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지만, 막상 부딪혀 보니 그 거대한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허술한 종이 벽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은 용기 하나가, 멈춰버린 나를 다시 세상과 마주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