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의 짧은 충돌로 인한 상처는 여전히 깊고 잔인했다.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과 성공적인 삶의 단편들은, 마치 나를 다시 단단한 등껍질 속으로 밀어 넣는 거대한 손길과도 같았다. 어둠은 안전했고, 고립은 익숙했다. 창문을 굳게 닫고, 커튼으로 몸을 숨긴채, 나는 세상이 내게 들이닥칠 틈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나의 현실은 오직 이 네모난 방 안과, 그 안에서 빛나는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존재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상에 나가 무언가를 제대로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나의 꿈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적인 기대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은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의 모든 길을 일방적으로 정해 주려 했고, 그들의 틀에서 벗어나는 나의 모든 시도와 도전은 가차 없이 반대와 억압으로 짖눌렀다. 결국 나의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이 되어버렸고, 그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쓰러졌다. 그 후 나는 어떤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열정은 완전히 사라졌고, 도전하려는 의지조차 흔적도 없이 말랐버렸다. 세상에 나서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고, 그 실패는 나 자신을 갉아먹는 고통스러운 자기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게임은 나에게 유일한 피난처이자, 동시에 세상과 연결되는 가느다란 끈이 되어주었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과거의 실패한 나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익명의 유저, 혹은 파티원의 일원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가끔 게임 파티에서 오프라인 정모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화면 너머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혹시나 그들이 온라인에서의 나보다 현실의 나를 보고 실망하거나, 어딘가 한심하다고 무시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은 벌써 수차례 정모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올리곤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애써 몇 차례 거절하며,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며칠 전, 평소 내가 즐겨 하던 게임의 파티 정모 공지가 다시 한버 올라왔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단체 채팅방에 누군가 '이번에도 안나올거냐'는 장난 섞인 물음을 던졌을 때, 나는 그저 웃음 이모티콘만 남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를 직접 언급하는 사람이 있었다. 늘 과묵했던 파티원 중 한명이 내가 이번에 가면 참석하겠다고 말해버린 것. 아마 나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으려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조용히, 개인 메세지 하나가 도착했다.
'저도 이번에 처음 가는데... 혹시 같이 가볼래요?'
나는 순간 망설었다. 늘 그 어떤 만남도 거절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에는 제안을 쉽사리 거절하기가 망설여졌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다시 메세지가 왔다.
'아.. 제가 불편하게 해드렸나요?'
불편함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그녀의 메세지, 그리고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배려에 나는 왠지 모르게 '아니요'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아니에요, 그때봐요.' 결국 무의식중에 그렇게 답장을 보내버렸다. 가슴 한구석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다행이도 그녀가 단체 채팅방에서 언급해주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관심을 받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참석한다는 많은 기대를 받을까 불안하기도, 현실의 내 모습에 실망할까 무섭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과 걱정이 뒤섞인 채 만남의 시간은 점차 다가왔다.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그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 새벽까지 게임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본 파티원들이 메세지로 '늦게 자서 오늘 못 오는거 아니야?'는 장난 섞인 말을 던졌다. 순간, 솔깃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얼마 만의 외출일까. 옷장을 뒤져봤지만, 역시나 나갈 때 입을 만한 옷은 늘 입던 후드티에 추리닝 바지 조합 외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며칠 동안 샤워를 하지 않은 거울에 비친 내 초라한 모습에 다시 한번 절망감이 밀려왔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면도기를 찾아 얼굴을 정리하는 것,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조차 평소의 나에게는 엄청난 일로 느껴졌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머리도 수염도 최대한 단정하게 정리했다.
대단한 외출도 아니었지만, 나의 무너진 일상 속에서는 엄청난 결단이었다. 조심스럽게 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불안감이 덮쳐왔다. 바깥공기는 너무나 어색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발걸음은 여전히 어색했고, 심장은 불안하게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정모 장소는 시내에 있는 어느 한적한 카페였다. 예상대로, 이미 많은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에 어쩔 줄 몰랐다. 대부분 모든 파티원들은 서로 얼굴 보여주기도 했다. 나 역시 자주 게임하는 파티원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고 그들은 내 당연히 내 얼굴을 모를 테니, 먼저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저 어색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 혹시 정모 오신건가요..?"
어색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그가 크게 눈을 뜨며 외쳤다.
"뭐야! 우리 드디어 처음 보네!"
그는 그 누구보다 반갑게 나를 마주해주었고, 주저하는 나를 자연스럽게 다른 파티원들에게 한명씩 소개해 주었다. 게임 속에서 파티장인 그는, 현실에서도 능숙하게 사람들과 나를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그 다정하고 배려 깊은 마음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름 게임에서 대화를 많이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굳어있던 내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나 풀리고 있었다. 파티원은 총 8명이지만, 그 자리에는 나를 포함해 7명 밖에 없었다. 내게 개인 메세지한 그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핑계가 필요했던 걸까'
작은 아쉬움이 밀려왔고, 나는 괜스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망설임 없이 빈 내 옆자리에 앉았다. 회색 후드티에 검정색 추리닝 차림. 나와 너무나도 흡사한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어..?' 하고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방도 내가 누군지 아는 듯, 그리고 나와 비슷한 차림에 놀란 듯이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우리는 약간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파티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후로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바깥세상이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스러운 감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이라는 아주 작고 새로운 이유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세상 앞에 서면 서툴고 겁이 많았지만, 방 안으로 숨어들고 싶을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주던 파티원들의 모습 떠올렸다. 아직은 너무나 희미하지만, 다시 한 걸음씩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어 보고 싶은, 아주 미약한 의지가 내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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