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무슨 치마야. 힐도 신지 마."
초년생 시절 당시 회사의 여자 선배가 했던 말이다. 기자는 기동성이 좋아야 한다는 게 치마와 힐에 금지령이 내려진 이유였다. 옷이 퍼포먼스도 끌어올리는 건가. T.P.O라고 하지 않나.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 신입 기자에게 T.P.O란 바지 정장으로 입력됐다.
그분은 꽤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기자였다. 이제 갓 입사한 나에게는 신 같은 존재다. 신이 치마는 물론 힐도 신지 말라고 한다. 그녀의 말은 십계명처럼 돌판에 새겨졌다. 율법에 어찌 의심을 품으리오.
또각또각했던 내 출근길은 철퍽철퍽으로 바뀌었다. 납작한 단화를 신고 다녀서다. 신입 사원 냄새 풀풀 나는 H라인의 치마 정장은 결혼식 하객룩이 됐다. 그 얘길 듣고 일 열심히 하라며 우리 엄마는 어디서 마사이족 워킹슈즈 같은 신발도 사다 줬다. 결단코 신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몇 번 신어보니 너무 편하더라. 나는 출근길 마사이족이 되었다. 회사에선 정장에 걸맞은 신으로 갈아 신어야지. 20대 중반에 초등학생처럼 신주머니가 생겼다.
하지만 복장으로 한번 지적받고 나니 그의 모든 눈초리에서 중압감을 느꼈다. 위에서 아래로 한번 훑으면 '오늘은 내가 또 옷을 어떻게 잘못 입은 거지'라는 걱정부터 먼저 엄습했다. 신같던 선배의 싸늘한 눈길에 나는 자신감을 잃으며 매일 고사(枯死)해갔다.
동시에 현장에 나가기 시작하니 조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다른 여자 기자들은 치마도 잘만 입고 다니는데? 그뿐인가. '응? 선배도 치마 입잖아요.' 순진했던 나는 그분이 의복에 관계없이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새 직장에 취업하고 나는 복장 규제에서 해방됐다. 화가 난 모세처럼 율법을 새긴 돌판을 던져 부숴버렸다. '나는 패셔니스타가 될 거야'라며 그동안 사고 싶었던 화려한 무늬의 온갖 옷들을 사기 시작했다. 당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너풀거리는 스트랩 힐(상상이 안될 거다)을 신고 출근해서는 '아 불편해'라며 당구장 슬리퍼로 갈아 신고 일했다. 전 직장의 그 여자 선배가 보면 하극상인 일이다.
그분의 말마따나, 기자가 기동성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돌아다니며 전화할 일도 많아서 힐을 신으면 불편하다. 장시간 자리에 앉아 기사도 써야 하니 치마를 입으면 답답한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바지를 입어야지만 기동성이 좋아지는 건가. 상관관계는 있을지언정 인과관계는 없는 얘기다. 바지야 편하기는 하지만 치마 입고도 일 잘하는 사람들 얼마든지 있지 않나. 바지를 입든 치마를 입든 업무 결과에 따른 책임은 그 사람이 짊어질 몫.
직장 내의 이런 여-여 갈등을 두고 일각에서는 '여적여'라고 깎아내린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조롱 섞인 말이다. 직장 생활 좀 먼저 했다는 여자 직원들이 새로 들어온 여자 직원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적대시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적여'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빌런들이 어느 회사나 꼭 한두 명은 있는 거 같다.
한 지인은 10년 이상 차이나는 여자 상사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한다. 남자 고객을 만나는 저녁 자리에 꼭 데리고 가서는 만취가 되면 자길 버리고 간다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자기가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한다고 한다. 당시 이 여성은 20대 후반의 미혼이었다.
회사 인사팀, 노조에도 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당한 성희롱, 성추행은 남성이 저지른 거지 그 여자 상사가 직접 뭘 어떻게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방조죄' 정도려나? 그 지인을 자신의 절규를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자조했다.
이런 일련의 직간접적인 경험은 여고, 여대를 다니며 한 번도 겪지 못해 본 일이었다. 여자와 누구보다 부대끼고 살았다고 했는데도 이런 문화는 또 처음이었다. 그 전엔 학생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외모 얘기. 외모는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각자 개성의 일부였다. 패션은 더욱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잘 꾸미면 잘 꾸미는 아이, 예쁘면 예쁜 아이였지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녔다.
남성과 섞여 지낼 일이 없으니 술자리에서 이용하고 이럴 일도 전혀 없다. 학과 엠티에서도 술은 그저 약간의 흥을 돋우는 음료였을 뿐. 교수님들과 자질구레한 농담 하며 예능 프로나 밤새 보던 그런 엠티였다.
그래. 어쩌면 입사 전 근 10년간 나는 내가 여자라는 걸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의 모두가 여자였고 경쟁을 해야 할 부분은 학교 성적 이외에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은 '여자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그냥 같은 학교에 속한 다양한 구성원일 뿐이었다. 여적여 세계를 모른 건 내가 다녔던 학교들의, 혹은 나의 특수성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나와보니 나는 '여기자'가 됐다. 남녀 비율 최소 50:50, 심할 때는 90:10의 인구 구성이다. 다른 성별과 함께 있으니 그 성별이라는 게 경쟁을 위한 자원이 됐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소수인 여성들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 곳. 나보다 눈에 띄는 여성이 생기면 견제를 하는 그런 여성들이 빌런으로 나타난다. 이런 빌런들 때문에 여성들이 획일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니 명치가 답답하고 복창이 터질 노릇이다. 이들을 두고 부르는 명칭도 있다. '명예 남성'. 겉은 여자지만 속은 남성화되어서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한단 의미가 담겨있다.
여자들끼리 싸우니 얼마나 비난하기 쉬운가. 사실 남자들끼리 경쟁도 심하고 온갖 사내정치 중심에는 남성들이 있다고 하지만 '남적남'이라는 말은 없다. 너무 당연하고 일상다반사라서 그런 걸까? 먹이사슬로 따지면 말단 여성은 조직 내 많은 갈등의 최대 피해자다. 남성에게 애당초 여성은 경쟁 상대란 개념도 없는 걸지도 모른다.
여적여 경쟁 방식은 그리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직장 내 여성 직원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데 얼마나, 몇 명이나 더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덧붙여 말하자면 사내 정치, 커넥션을 따지는 직장 생활도 향후 몇 년이나 기업 문화를 지배할지 의문이다. 모두가 입 모아 얘기하는 '요즘 애들, 90년대생'이 언젠가 과장, 차장되지 않겠나.
이런 남을 짓밟고 살아남으려는 빌런들은 점점 설 곳이 없어질 것이다.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염원이 담긴 선포다. 이제는 생각이 깨인 여자 선배들이 사기업, 언론계, 법조계, 정부 등 다양한 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자기가 당하고 산 어려움은 겪지 말라고 도와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끼리 네트워크 활동도 활발하다. 이런 모임을 주선하는 스타트업도 있고 여대 동문회는 점점 활기를 띄는 추세다. 이제는 '여돕여'의 시대다. 여자를 돕는 건 여자라는 얘기다.
아직도 여적여 프레임에 갇혀 다른 여성을 밟고 성공을 지향하는 여성이 있다면, 잠시 숨 돌리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보자. 동성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 리더십을 구축하는 편이 이제는 훨씬 설득력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