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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May 28. 2020

루부탱을 신고 끌로에 드레스를 입는 페미니스트

대단히 성공한 한 여성 사진작가가 있다. 결혼도 남자도 양육비도 다 필요 없는데 아기가 너무 갖고 싶다고 한다. 지인 남자들을 바(bar)로 불러내 달콤하게 속삭인다. '그러니까, 정자 조금만 주면 되!'


넷플릭스 오리지널 일본 드라마 팔로워들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들은 한결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남자? 그런게 왜 필요해. 내 삶이 훨씬 중요해.'


각자 나름대로 로맨스를 하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야 일이야?'라고 묻는 썸남에게는 '(돌았나?) 일이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들은 루부탱 구두를 신고 끌로에 드레스를 입는다. 구찌에서 쇼핑을 하고 돈 없는 어린 여자 주인공에겐 '힘껏 발돋움 해서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는 여자가 되라'라고 조언한다.


더 아름답게, 더 자신있게 행동한다. 왜냐면 나는 그럴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그게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니라 나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다. 하이힐을 신든, 드레스를 입든, 등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든, 이들은 나 자신을 뽑내고 사랑하는 데에 집중한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있는 힘껏 뽐내고 그러면서도 타인, 특히 남자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화려한 조명이...' 아니라 화려한 의상과 삶이 그녀들을 감싼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코르셋을 조여도 단단히 조인 외형인데 그들의 삶과 마음만은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이 그녀들을 자유케 한다.


탈코를 하지 않았으니 페미니스트가 아닌 걸까? 보는 내내 '내가 저리 꾸민 게 언제더라' 싶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런 옷들은 다 버리거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착용감을 중시한 옷들만 옷장에 남아있어서다.


페미니즘을 지향하면서부터 나의 패션 세포는 징역 상태다. '원피스, 치마, 하이힐 금지. 헤어스타일도 되도록 숏컷을 할 것. 안되면 단발이라도. 남들에게 외모로 잘 보이려는 노력은 코르셋이다.'


내가 만난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자기 검열이 엄격하다. 잘만 입던 옷과 구두를 내다 버리고 머리를 싹둑 자른다. 플레어 스커트가 퍽 잘 어울렸던 친구인데 갑자기 슬랙스에 단화를 신는다. 단톡에서 장신구나 미용에 관한 얘기라도 하면 바로 견제가 들어온다. 원피스 얘기라도 꺼냈다간 '그건 코르셋이지'라고 누군가 툭 지적한다.


코르셋은 벗었을지 몰라도 족쇄가 생겼다. 무릎 위로 올라온 치마는 보지도 못한지 오래. 그건 뭐 아이 엄마가 되어서 불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롱스커트를 입어도 '아 오늘 나 페미니스트로 안보이네'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기 마련이다.


탈코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남성, 타인을 의식한 외모 꾸밈 노동은 지양한다.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있기 때문에 소모적이고 끝이 없다.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고 자기 자신의 존엄성은 좀먹게 된다. 타인의 평가와 시선이 족쇄가 된다. 그런 코르셋은 벗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코를 응원한다.


하지만 코르셋 벗는 목적이 뭔가. 이 모든 평가와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찾기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남성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여자는~' '남자는~'으로 시작하는 근거 없는 명제들이 우리가 답습해온 족쇄다.


그렇다. 페미니즘의 시작은 여성의 해방이었다. 여성이 시민 취급도 당하지 못하고 참정권도 갖지 못하던 시절. 남성의 부속품으로 취급되던 시대(1800년대)에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여성주의 창시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언니가 그랬다. '여성들이여, (중략) 깨어나라!'


깨어나자. 그게 시작이다. 탈코가 제시하는 새로운 원형(prototype)은 어쩌면 같은 여성들에게 또다른 억압 기제가 될지도 모른다. 머리를 싹둑 잘라야만, 바지에 낮은 굽의 구두를 신어야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외형이 탈코의 기준이 되면 우리는 다시 그 원형에 갇힐 것이다. 끊임없이 그 모습에 충족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영화 배우 엠마 왓슨도 최근 누가 세웠는지   없는  기준 때문에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미국의 연예 잡지 배티니페어(Vatiny Fair)에서 가슴을 노출한 화보를 찍은 . 일각에서는 이런 노출 화보에 비판을 해댔지만 그녀는 여기에 당차게 반격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여성을 때리는 무기가 아니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785265.html)

논란이 된 엠마 왓슨의 화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데 같은 여성끼리 이러기냐. 계몽을 근거로 탈코를 외친다면 그것은 탈코를 선택하지 않는 이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거다. 만약 탈코 주장의 근거가 계몽이라면 그것은 1800년대의 남성우월주의와 얼마나 다른가.

여하튼 아직까지 나는 아웃핏 때문에 (일부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사회에선 아웃이다. 마음만은 페미니스트 중의 페미니스트요 인권 존중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인데, 탈코를 하지 않았으니 서류 탈락이다. 원피스와 치마를 여전히 즐겨 입는 내가 어찌 진정한 페미니스트겠는가.


그래도 삶을 통해, 육아를 통해 여성 해방의 가치를 실현하는 게 내 목표다. 딸에게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위대한 인간이야'라고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힘껏 발돋움 해서'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네 삶을 자유롭게 누리는 사람이 되라고. 루부탱을 신든, 발 편한 락포트를 신든, 끌로에 드레스를 입든, 다 찢어진 디스트로이드 진에 노브라로 티셔츠 하나 걸치든, 모든 것은 네 자유고 반드시 인간으로서 그 자유를 만끽하고 살라고 가르칠 것이다. 페미니즘의 원래 목표는 해방이니. 나역시 누가 '넌 탈코를 했네' 안했네 지적해도 개의할 필요 없다. 그게 진짜 해방이고 나라는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닐까.



Photo by Lindsey LaMon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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