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성미니멀 Dec 21. 2022

1순위 너구리, 33순위 엄마

 아이의 라면 사랑은 각별하다. 라면 한 대접을 오롯이 받아 들고 좋아하는 아이의 환한 얼굴을 보면 그간 요리를 하며 들였노력과 정성이 무색해진다. 맛집이라고 찾아가도, 여행지에서도, 메뉴에 라면이 있으면 선택은 라면이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후식으로 라면을 먹는 것이 절충안이다. 


 밥보다는 면을 좋아하고, 이토록 간단하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맛있 한 끼가 될 수 있는 라면 존재아직도 여전히 가끔 탄복을 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한밤 중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라면을 후루룩 거리는 걸 보면 사실 이해가 간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분식집 라면. 맛이 다르단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라면은 집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으니 내가 잘해줄 수 없는 메뉴를 골랐으면 하지만 계란과 대파가 살포시 올라간 라면이 테이블에 탁 올려질 때 간의 설렘까지 느껴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 "김밥이랑 같이 먹어"라는 소리밖에 안 나온다.


 작은 집에 이사 오기 전 자주 가  분식집 사장님은 "분식집 라면이 맛있고 그중에서도 여기 라면이 제일 맛있어요!" 하는 아이의 말에 "네가 뭘 좀 아는구나"이렇게 답을 하시며 부엌 안쪽을 살짝 보여주다. 양은 냄비 바닥은 물론 그 옆면까지 덮을 정도의 강력한 파란 불길로 라면을 끓이고 계셨다. 가정집에서 아무리 최대로 끓여도 가게 화력과 비교가 안된단다. 이렇게 강력한 화력으로 끓여내니 면발도 쫄깃하고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몹시 동의하고 만다. 

이미지출처 http://reviewboy.tistory.com/103

 분식집 라면에는 밀리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우리 엄마는 진짜 라면 잘 끓인다!라고 종종 감탄을 해준다. 라면 개발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은 험을 통해 가장 맛있을 조리법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라면 봉지에 적혀있는 딱 그대로의 물의 양과 조리시간을 지켜 라면을 끓인다. 라면에 따라 계란이나 파를 넣으면 더 맛있는 것도 있지만 딱 라면만 그 레시피대로 끓였을 때 이런 훌륭한 것을 누가 발명했을까 하는 감탄과 감사가 다시 한번 나온다.


 작은 집에 이사 오고 나서더 맛있게 라면을 끓여낸다. 가스레인지가 있던 예전 집에서는 스텐 냄비 면적을 넘어가는 불을 사용하면 바닥이 타니 화력을 최대로 키울 수는 없었다. 작은 집 수납공간이 너무 없어 계량기함을 붙박이장으로 개조하면서 가스 밸브 자체를 다 제거하고 인덕션을 놓았는데 여기 최대화력으로 물을 끓이면 1분이 되지 않는 사이에 라면 물 550ml가 끓어오른다. 면발과 수프를 넣을 때 확 끓어오르니 그때만 살짝 줄여 넣고 다시 센 불로 적혀있는 레시피보다 약 30초를 덜 끓이면 분식집 라면의 맛이 난다. 역시 화력이었다. 이는 귀신같이 차이를 알아내고는 '분식집 라면처럼 맛있다'라는 극찬을 해주었다.


 얼마 전 축구경기가 있는 에도 아이는 라면이 먹고 싶다며 애교를 부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살짝 말리는 말을 하면서도 이미 소용없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다. 라면은 누가 뭐래도 딱 한 개를 작은 냄비에 끓였을 때 가장 맛있다. 물양을 조금 줄여봐도 이상하게 하나 끓였을 때 그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콕 집어 너구리를 끓여달란다. 너구리는 가끔씩 당기는 날이 있단 말이다. 일단 다시마를 먼저 넣고 센 불 끓여낸다.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끓였다 싶은 탱글탱글한 면발을 아이 그릇에 담아주는데 얼큰한 너구리 냄새가 확 퍼진다.

너구리는 꼭 한번씩 당기는 날이 있다

  ASMR이라 라면 후루룩 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엄마 한 젓가락만 주라' 했는데 안된단다. 자기 안 먹는 다시마만 먹으란다.  딱 한 젓가락만 달라고 또 이야기했는데 절대 안 된단다. 다시마를 건지면서 면발 한가닥, 그것도 짧은 면발 한가닥을 살짝 들어 올렸는데 야박하게 면발을 다시 가져간다. 그 순간 그게 뭐라고 서운함을 넘어 화가 난다. "아니 너는 엄마가 이 밤중에 라면 끓여서 줬는데 한 가닥도 못 먹게 하는 거야?" 하는데 이게 또 말로 나오니까 감정이 급상승하며 느닷없이 서러워진다. 아이는 "너무 먹고 싶은데 왜 달라고 해. 그러면 두 개를 끓여야지." 하는 거다. 억울하기도 하겠다는 생각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아 이렇게 서운할 수가.


 배도 딱히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절대 라면을 주지 않겠다는 아들과 기싸움하듯이 새 냄비에 너구리 하나를 오롯이 끓여서 밤 11시에 먹고 말았다. 유치하다. 그게 그렇게 서운 일인가. 그런데 그 순간에는 그랬다.


 각자 한 냄비씩 라면을 비우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축구를 보는데 아이가 미안하단다. 쿨하게 괜찮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원래 사람이 사소한 먹을 거에 마음이 상하는 거라며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너의 1순위는 너구리이고 엄마는 33순위인 거야." 했더니 왜 하필 33순위냐고 묻는다. 나도 왜 33이 나왔는지 모르겠으면서 1순위 너구리, 2순위 육개장사발면, 3순위 짜파게티 이러다 보면 33순위잖아! 설마 35순위냐? 이러고 있었다. 아, 질하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엄마가 갱년기라 그런다고 또 이야기해 준다. "갱년기가 뭐 라그랬지?" 하는 아이에게 "사소한데 마음이 상하고 아주 쉽게 상처를 받는 시기"라고 힘주어 설명해 준다. 또다시 자기 사춘기 카드를 꺼내길래 갱년기가 최우선으로 돌봐야 할 시기라고, 내가 정한 서열이 마치 우주의 진리인 듯 말해준다.


 화해를 하고 축구를 보다가 뒤끝이 쩌는 갱년기는 뜬금없이 또 말한다.

"먹는 걸로 사람 서운하게 하지 말자."

뒤끝이 작렬하는 엄마를 보는 사춘기 눈빛에 '갱년기는 피곤한 거구나' 하는 마음이 읽힌다.

"엄마는 33순위 아니야. 거기서 32 뺀 게 엄마 순위야."

 무심하게 말하고는 다시 축구를 본다. 사춘기 말에 또 마음이 벅차버린 갱년기여기서 진짜 눈물이라도 찔끔 나면 주책인 것 같아 벌떡 일어나 냄비들을 치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부각이 내 이름이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