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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Mar 27. 2023

스마트폰을 빌려줬을 뿐인데

 하필이면 조카랑 닮았다.

 마스크 아래의 얼굴은 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조카랑 닮은 얼굴을 하고 핸드폰이 방전되어 그런다고, 전화 한 통만 하게 스마트폰을 빌려 달라고 불쌍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그 한마디에, 그 짧은 순간에 나의 뇌가 아직도 이렇게 빨리 돌아갈 수 있깜짝 놀랄 만큼 많은 가능성과 장면이 예전에 읽었던 기사들과 결합해 돌아간다. 그 와중에 낮에 분명 땀이 날 정도로 더웠는데 해가 지자마자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짧은 치마 밑으로 너무 가느다란 다리가 보여서 더 고민 됐을 테다.

 

 하필이면 바로 어제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예고편 같은 광고를 보고 말았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뀐 상황을 마주친 천우희 배우의 그 리얼한 표정이 바로 떠오른다.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 이야기는 소복에 피 칠을 한 귀신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우며 그 잔상은 오래 남는다.  얼마 전 필요가 있어 찍어놓은 신분증 사진도 아직 지우지 않은 것이 기억났다. 딱 잘라 안된다고 이야기할 것을 참으로 어리바리한 말투로 '아... 스마트폰은 좀...'하고 얼굴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도착예정이라고 나왔던 버스가 오기까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이제 나는 신경도 쓰지 않을 그 학생과 나의 시야가 절대 겹치지 않을 때까지 애써 외면하다 겨우 한숨을 쉬었다.

 당장 스마트폰을 들어 뉴스 검색을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빌려줬을 뿐인데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2016년부터 줄줄이 나온다.


-숙박업소를 운영하던 피해자 A 씨는 퇴실하던 손님이 휴대폰이 방전되어 문자 한 통만 보내게 해 달라 해서 10분간 휴대폰을 빌려줬는데 돌려받은 핸드폰은 먹통이 되어있었고 다음날 전원을 켜자마자 700만 원이 출금되었다는 문자를 받는다. 은행 송금에인증서나 비밀번호 필요하지만 이를 무력화시키는 어플을 깐 것으로 추정된단다.


-택시기사 B 씨는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 돈을 송금받아 요금을 지불하겠다는 승객에게 스마트폰을 단 1분가량을 빌려줬는데 한 달 뒤 요금명세서를 받고서야 그 짧은 사이 소액결제로 29만 원을 결제한 것을 발견했다.


-미국의 C 씨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거절 후 그럼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할 테 스마트폰만 잠깐 빌려달라는 이야기에 핸드폰을 내줬다가 순식간에 모르는 사람에게 SNS 간편 송금이 되는 일을 겪었다.


지금은 2023년. 세상 그 어떤 기술의 진보보다 혁혁하게 빠른 사기의 진화. 예전에도 이 정도라면 지금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까지 가능할 수 있다.

 내 스마폰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가.

 아무것도 없이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나가도 나의 생활은 불편함 없이 잘만 굴러간다.


 간편 결제등록을 해 놓은  쇼핑 사이트에서는 심지어 비밀번호 입력도 없이 물건을 바로 살 수 있다. 실물카드 없이 결제를 하고 은행에 앉아 대기표를 뽑을 필요 없이 돈을 이체한다. 이제는 계좌개설까지 가능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은 이제 나의 스마트폰이다. 내가 나인지 증명하는 것은 내 얼굴보다 내 스마트폰의 몫이 되었다. 내 얼굴을 아무리 들이밀고 나라고 주장해도 안 되는 일들은 스마트폰으로 온 인증번호 두 자리를 입력하는 순간 확실히 나인 게 된다. 어느 기기로 로그인을 하던 스마트폰으로 보낸 인증서를 확인만 해주면 그것이 바로 나라는 인증이다.


 아주 오래전 핸드폰을 빌려줄 때는 이 사람이 혹시라도 국제전화를 쓰는 게 아닐지, 오래 전화해서 요금이 많이 부과되는 게 아닌지 정도만을 걱정했다면 지금 나의 스마트폰을 누군가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내 일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까지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버튼 하나면 내 전화번호가 노출되고 그 번호로 받은 문자의 링크를 하나만 누르면 내 스마트폰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닌 게 되는 세상. 그리고 그 안의 나의 세계는 남이 모두 조종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거다.


 이제는 누군가 길을 물어도, 잠깐 말만 시키려고 다가와도 나도 모르게 움찔하게 된다. 이어폰까지 끼고 있는데 왜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 하필 나에게 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지하철 역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묻는 노인에게 동병상련을 느껴 친절히 길을 알려주고 돌아온 W의 가방에 있던 지갑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닐 수도 있지, 내가 다른 데 떨어뜨렸을 수도 있지 이야기해 보아도 말하는 그녀도, 듣는 나도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 아줌마는 왜 이렇게 오버하며 소설을 쓰는 걸까 그녀는 억울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잠시 빌려줬는데 그다음 날부터 엄청나게 많은 스팸전화에 시달렸다는 글과, 그 사이 어떤 일을 했을지 몰라 계속 찜찜하고 걱정된다며 '스마트폰을 빌려주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지요?'를 인터넷에 올린 그들처럼 나 역시 평소와 이만큼이라도 다른 일이 발생하면 분명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 틀림없다.


근처에 휴대폰 충전하는 곳도 있고, 바로 길 건너에 공중전화도 있으니까 찾겠지 이러면서,

차라리 처음에 거절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내게도, 그저 전화 한 통 하는 것이 필요했을지 모를 그녀에게도 나은 거라

내 맘 편한 쪽으로 머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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