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성미니멀 Mar 19. 2022

미니멀리스트라도 20평 줄인 이사는 힘들 거다!

 의도치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미니멀 라이프' 소리를 듣는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릴 때부터 정리에 능했다. 청소를 할 때 물건을 들어  밑의 먼지를 닦고 다시 그 자리에  잘 내려놓는 엄마와 달리 나는 밖으로 나와 있는 물건을 싹 집어넣었다. 내가 청소를 한날은 티가 났다. 커서도 늘 집은 깨끗다. '집 너무 깨끗하다~'했었는데 어느 순간 '아니 이 집 왜 이래?' 하니, 성격 이상해 보일까 봐 쉽게 사람을 못 부른다. 미니멀 라이프까지는 아니지만 그 근처에 와있는 경계성 미니멀이라고 자체 판단다.


 스스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 간소한 삶을 살려고는 하는데 '필요한 것'의 기준이 관대하다. 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건 일단 필요한 거다. '한 용도의 물건은 하나씩' 이런 건 안된다. 절대 늘지 않는 칼질 덕에  한번 요리할  때 부엌 가위 네 개도 부족하다. 고기 자른 가위로 채소 자르기는 싫다. 버리는 건 잘하는데, 새로 잘 산다. 꼭 미니멀 인테리어가 나쁜 건 아니잖냐며 합리화를 한다. 컵, 문구 등 특정 장르는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아무리 노력해도 물욕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는 정리정돈과 수납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거지, 미니멀 라이프는 아닌 게 확실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30평대 신축, 이사 가는 집은 15평이 채 되지 않는 구축이다. 준공연도 17년 간극의 두 아파트는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니다. 건축기술의 진보를 새삼 실감한다.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신축 아파트 각 방에는 붙박이장이 있고, 주방에는 넉넉한 상하부장, 수납공간이 딸린 두 개의 화장실이 있다. 이것뿐 아니다. 보조 조리대는 주방 가전들을 늘어놓고 써도 깨끗하고 그 밑 공간에는 상하부장에 넣고도 남는 그릇이 싹 들어간다.  ㄷ자 주방을 완성해 주는 아일랜드 식탁은 수납력이 대단하다. 내부에 자잘한 부엌살림을 다 넣었다. 큰 안방 벽면을 가득 채운 붙박이장은 별도의 드레스룸 없이도 모든 옷들이 낙낙하게 들어가 있다. 주방 팬트리룸은 또 어떠한가. 어지간한 것들을 다 넣어두고 문을 닫으면 깔끔 그 자체다.

 이사 가는 집에는 기본 수납공간이나 옵션이 단 하나도 없다. 거실 내력벽 옆 애매한 공간에 짜 놓은 장 하나가 끝이다. 두 아파트의 도면을 번갈아본다. 똑같이 A4용지에 출력된 두 집의 크기는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사 갈 집에 적힌 치수가 참 야속하다. 큰 집에 있던 두 도면과 작은 집 사진을 번갈아 가며 본다. 이건 경계성 미니멀 가지고는 안될 일이다.


 작은 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니 얼마나 작은지 묻는다. '지금 집에 안방 말고 작은 방 두 개 있잖아' 하니 '그거 뺀 거만 해?' 다. '아니 집 크기가 그 방 두 개 합친 거만 해'라고 하니 엄청  웃는다. 말하는 나도 웃기긴 하는데 걱정이다. 20평 줄여서 작은집으로 이사 간다는 것, 이건 진짜 미니멀리스트라도 분명 힘들 거다!


왼) 큰 집 주방 보조 수납장-지금 집의 싱크 하부장 두배가 넘는다         오) 2m 책장 두 개와 장난감을 다 넣어둔  큰집의 작은방. 지금 집의 거실보다 크다

 이제 집안을 둘러보면 '이거 가져갈 수 있을까?' '이거 버릴까?' 이 생각만 난다. 자려고 누워서도 머릿속은 이사 갈 집 도면이다. 고등학교 때 당구에 심취했던 친구는 수업시간에 칠판을 보면 초록색 당구 다이로 보였다 했다. 앞자리 애들 머리통으로 이걸 쳐서 이걸 맞추고 저걸 맞추고 이러고 있었단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책상을 여기 넣을까, 책장을 저기 넣을까 이러고 있다. 누웠다가도 일어나서 여기저기 열어 보면서 이건 버려야겠다, 이건 가져갈까 이런다. 이 정도면 병이다. '작은집 이사병'이라고 혼자 병명을 붙여본다.

 

 나는 알고 있다. 어느 정도 물건을 싸가도 분명 차곡차곡 잘 집어넣을 것이다. 나는 수납과 정리정돈에 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물건 하나를 꺼내기 위해 앞에 겹쳐 놓은 물건 두 개를 꺼내야 할 것도 알고 있다. 그건 싫다.


 결론은 하나다. 비워야 한다. 아주 많이 비워야 한다. '필요한 것'의 기준을 높여야 한다. 큰집과 작은 집에서 그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 지금만큼의 쾌적함을 느낄 수는 없더라도, 답답해서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나는 그동안의 관대함을 버리기로 한다. 작은 집에는 '없으면 절대 안 되는 것'만 들어가는 거다.  


 그래도 부엌 가위가 두 개는 있어야겠다. 작은 집에서도 심신은 편해야 하니까.



이전 01화 20평을 줄여 이사 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