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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죽은 공무원들의 사회

캡틴, 오 마이 캡틴


내가 첫 근무하게 된 L 동사무소. 말끔하게 지어진 진한 회색의 일자형 2층 건물에 수십 명이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책상들 위에는 커피를 마시고 남은 일회용 종이컵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각종 서류와 법령 및 지침 책자, 필기도구, 인주와 도장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직원들은 일에 찌들인 듯 다들 피곤해 보였고, 억지로 앉아 일하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담배를 물고 근무하는 직원도 보였다. (당시에는 실내 금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정식 임용까지는 6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쳤는데, 첫 3개월은 민방위 보조업무를 하다가 나머지 3개월에는 민원 업무를 맡았다. 주로 신규직원이 맡는 등초본 및 제 증명 발급업무였다. 이 업무는 동사무소에서 가장 많은 민원을 상대하고 꺼리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서류를 수기로 발급했는데, 민원인의 요구사항을 인적 및 법적 검토를 한 후 해당 자료를 찾아 복사하거나, 또는 양식에 기재하여 동장(洞長) 직인을 찍어 발부하는 업무였다. 청각장애인의 업무적합도를 고려하면 인권이 무시된 업무였다. 하루에 50여 명, 많을 때는 100명 이상의 민원을 상대하다 보니, (청각장애인이 아니더라도 그럴만한) 잘 못 듣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민원인에게 거듭 양해를 구하면서 일을 하였다. 같은 유형들이 반복되는 건들은 익숙해지면 문제없이 처리하였지만, 돌발변수가 나오거나, 민원인에게 발급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으면 민원인과 소통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의 첫 상사였던 사무장은 “그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민원들이 기다리고 있어 빨리빨리 처리해 인마 ”등의 모욕적인 언사는 서슴없었다. 만 19세의 첫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면서 나의 장애가 곧 불편이 되는 끔찍한 세계에 놓여 있었다.


사무장은 나의 상황을 보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30년대생으로 정년퇴직이 3여 년 남은 사람이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에, 담배 골초에다 술에 절어있어 낯빛은 항상 붉었다. 사무장 책상 위에 있는 재떨이에는 피다 남은 꽁초가 항상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재떨이가 권력자의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일주일에 절반 넘게 사무장이 사무실 또는 근처 식당에서 직원들을 대동하여 술판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따라가지 않는 직원에게는 대놓고 '꼽'을 주었지만, 나는 대체로 참석하지 않았다.


근무한 지 6개월째 지난 어느 날, 응접실에서 저녁 회식 후, 사무장에게 지금 맡은 업무는 못 하겠으니 바꾸어 달라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그런데 사무장은“까면 까는 거야” 하면서“이거 못하면 니 같은 놈은 공장 말고는 갈 데가 없어 인마” 하면서 윽박질렀다. 나는 순간“당신이 인간이냐”하면서 울부짖으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고, 유리창까지 깨졌다. 하마터면 주먹다짐할 뻔했으나 동료들의 만류로 진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청 총무과에서 조사를 나왔고, 사무장은 그대로 놔두고, 나를 L 동사무소에 딸려 있던 S 분소의 비 민원 업무인 개별공시지가 업무(개별토지의 단위 면적당 가격을 산출하는 업무로 양도소득세, 재산세, 개발부담금 등의 기초자료로 활용)를 맡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내가 타 구청으로 발령받아 근무할 즈음에, 사무장은 퇴직 후 사업을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하다 중앙선을 침범 충돌하면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무원을 생활한 지 1년쯤 지난 후, 대학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 세계의 낭만을 느껴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성적만으로 입학할 수 있으면서 학비 부담이 없고, 직장생활도 가능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를 진학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내가 해볼 만한 동아리를 찾아보았다. 동숭동에 있는 대학교 본부를 포함한 각 건물을 순회하면서 게시판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신입회원 안내문을 들여다보았다. 방송반과 연극반 같은 예술 분야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강했지만‘동숭서도회'를 선택했다. 서예라면 대화는 많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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