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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사랑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도

아름답고 아팠던 시절


동숭서도회 회원 구성은 보통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나이대로 40여 명이 회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퇴근 후 동아리방에 갈 때마다, 항상 수십 명이 고요한 가운데 글쓰기 연습을 했다. 동아리 회장 지도하에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먹물을 묻힌 후, 신문지에다가 팔과 손을 움직여 가며 천자문을 쓰는 연습이었다. 묵향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동아리 친구들은 대부분 직장인으로 퇴근 후 일주일 2~3번 정도 참석했다. 보통 연습을 2시간 정도 하면, 밤 9시쯤 끝나고 이후, 뒤풀이는 빼놓지 않는 필수 코스였다. 동아리방에서 10분 이내에 있는 성균관대 주변에는 주막집이 많았는데, 주로 여기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많이 즐겨 먹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주변이 시끄럽고 여러 명이 오가는 대화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내가 듣기만 하고 있어도 그대로 받아 주는 듯했다. 맘 편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나를 반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직장에서 끔찍함과 고단함을 이 동아리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 나의 삶을 그렇게 균형을 잡아가는 듯했다. MT, 대학 축제, 동아리 홍보, 서예 전시회, 탁본 행사 등 대학 행사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참여할 때마다 나는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항상 있어서 좋았다.


동아리 2년 차에 접어들 때쯤, 4살 많은 누나를 만났다.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배려심 많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는 깡마른 체구의 이쁜 누나였다. 동아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얼굴도 닮았다며 남매로 인정하는 관계였다. 그런 관계가 6개월이 지난 어느 날부터인지, 그녀가 한 달이 지나도록 동아리에 나오지 않게 되자, 그녀의 친한 친구에게 수소문하여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에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내 딸은 결혼 준비 중이니, 앞으로 찾지 마라”며 차갑고 싸늘하게 말했다. 당시에는 20대 중반 여성이면 다들 결혼하는 시절이었다. 그때 무심코 듣다가 흘려들었던 그녀가 한 말이 기억났다. “난 널 좋아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반대할 거야”라는 말을.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는 동아리에서 흥미와 열정이 떨어져 나갔고, 자연스럽게 대학교와 동아리의 인연도 끊었다.


(그 이후에 다른 대학교의 입시에 도전했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 실제 입학도 해서 일과 학교를 병행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풀도록 한다.)


공무원 생활 2년 차에 개별공시지가업무를 함께 맡았던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이 5년이 지난 후 나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20대 중반 시절이었다. 그 학생은 똑똑하고 야무진 면이 있는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장군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사무실에 직접 나를 찾아와서 점심을 같이했다. 당당한 태도로 집안이 어려움에 부닥쳐, 본인이 일으켜 세워야 한다면서 사업자금 이천만 원 대출을 통해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성공하면 두 배로 갚을게요”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무원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주기로는 일등 직업이었다. 그녀의 언변과 강단에 홀렸는지, 그녀가 성공할 것처럼 보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정신이 나간 것이 모르겠지만, 결국은 보험회사에 내 명의로 대출을 통해 빌려주었고, 대출 이자는 그 학생이 알아서 입금하기로 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보험회사에서 독촉 고지서가 날라왔다. 이자를 첫 달 치만 내고 몇 달 치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통보로, 기한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나의 봉급을 압류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단은 급한 불을 끄고 그녀에게 계속 연락했으나, 오히려 돈을 더 빌려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나는 그때 서야 사기임을 자각하였고 일단은 매달 이자를 갚았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독촉했으나 배 째라 막무가내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는 방식으로 변경, 5여 년 동안 빚을 갚은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한 해에 2~4번 정도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사기까지 당한 나는 분노와 원망과 부끄러움과 절망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범벅되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시대처럼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면,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을 거다.


그러던 27살이 되던 해에 2살 어린 사랑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직장동료였고, 꼼꼼하고 세심하면서 약간 마른 여자였다. 나의 상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군말 없이 나를 계속 만났다. 엉망진창인 나를 만나주는 그녀는 삶의 빛줄기였다. 그녀는 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랑 결혼할 수 있다고 희망 고문했다. 단 "부모님의 허락과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조건"으로. 과연 나는 이 여자랑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의 위안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들이 누적되다 보니, 만난 지 2여 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4개월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이후 나는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집과 직장만을 오고 갔다. 일주일에 3~4번씩 술과 유흥에 절여 살았다. 밤새 속에 부어대며 마신 적도 흔했다. 주말은 무조건 집에서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잠만 잤다. 그런 생활이 4~5년 지나니 깡말랐던 내가 뚱뚱해졌고, 혈액순환이 잘 되지도 않는 것이 여실한, 안색도 좋지 못한 아저씨로 변해있었다. 이성적으로든 인간적인 호감으로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거나 가까이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이 세계에서 도피하고 싶은 맘에 해외여행이나 한번 나가보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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