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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이 세계에서 탈주하기: 여행과 마라톤

내면의 강산이 바뀌다

이 세계에서 나가보자고 결심한 일본 여행. 후쿠오카에서 출발하여 구마모토를 거쳐 미야자키에 도착한 후 귀국하는 7일간의 자유 여행 일정이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활발했던 시기는 아니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두려운 반 걱정 반이었다. 일본 입국장에서 통과시키지 않고 나를 잡아 교도소에 넣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까지 했다. 여행 첫날부터 나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해외이고 선진국이었으니까. 여행 중간쯤에 구마모토 아소산에서 화산을 둘러본 후, 미야자키까지 기차로 이동할 때였다. 4시간 동안 기차 안에서 창밖의 일본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장면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화산, 바닷가, 동굴, 산골, 고층빌딩이 없는 2층 이하의 주택들, 농가. 번화가. 그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까지. 그동안 겪어 본 적이 없는 세계에 온 것 같았고 묘하면서 흥분되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고, 나 자신은 과거의 불행에만 얽매여 주변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차를 뚫고 현장 속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은 당연했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듯했다.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야.”


귀국 후 나는 건강을 되찾아야겠다는 다짐으로, 한창 유행 중이던 마라톤을 해보기로 했다. 퇴근만 하면 남산으로, 한강으로, 집 앞 산책로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체계적으로 달리고 싶어 7주 과정의 마라톤 교실도 수강했다. 훌떡 벌떡 뛰는 심장 소리, 근육이 마구 움직이는 팔과 다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맺혀있는 땀방울들. 이런 것들이 달리기 고통 속에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운동 후 샤워할 때는 물줄기가 나의 몸을 휘감으면서 “수고했다”라고 말해주니,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실감했다.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여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였고, 주말마다 전국에 개최하는 대회도 참가하여 완주했다. 35살부터 7여 년 동안 한 달에 200~300km 달리기 훈련을 하였고, 전국에 개최하는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였다. 42.195km인 풀코스 22회, 하프 코스 40회, 10km는 셀 수 없었고, 특히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출발, 성남까지 오고 가는 100km 울트라 마라톤 대회도 참가 완주한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이다. 7여 년 동안 이만 킬로미터를 달렸으니, 마라톤을 직업으로 하는 선수보다 월등히 많이 달렸을 거다.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처절한 심층 훈련,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묵묵히 달리는 마라톤 친구들의 조용한 격려도 큰 몫을 했다. 마라톤 하면서 가장 큰 수확은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이어져 오던 10여 년의 기나긴 삶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난 점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졌던 열등감, 과거의 불행에 얽매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나 일을 할 때나 패배감으로 휩싸여있었다. 그러나 마라톤과 해외여행(첫 일본 여행 이후 매년 1회 해외여행을 했다)을 하면서 스스로 할 줄 아는 경험을 축적되다 보니, 어느새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나 자신을 감탄하는 능력, 나에게 집중하고 헌신하는 습관들을 갖게 되었다.


사계절 내내,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였으니, 마라톤과 함께 전국 여행도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라톤 완주 후 지역 특산물로 맛난 음식도 많이 접했다. 겨울에 달리던 포항 호미곶 마라톤 후 먹던 과메기, 한여름 대관령에서 산악마라톤 후 먹은 소고기, 마라톤 입문자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가을 단풍길이 이쁜 춘천마라톤 후 닭갈비 등. 또한 아름다운 비경을 보면서 달린 것도 특혜였다. 바다와 항구를 옆에 끼고 달리는 전남 여수마라톤. DMZ 지대를 두루 구경하며 철새와 함께 달린 강원도 철원마라톤. 아기자기한 시골길과 녹차밭을 벗으로 삼아 달리는 전남 보성마라톤 등.


직장일 이외는 마라톤에 푹 빠져 지내고 있던 30대 후반, 직장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에 D 구청 전산정보과에서 근무하면서 정보화 교육 담당을 맡게 되었다. 구청이 운영하는 정보화 교육장에 노인들을 대상으로 전산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행정지원을 하는 업무이고, 교육은 위탁업체에서 수행하는 업무였다. 문제는 매달 수강생 모집을 전화로 신청받는데, 이 부분은 공무원이 해야 할 업무였다. 나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팀장은 나의 첫 상사 사무장과 오버랩이 된 유형의 50년대생이었다. 술과 담배를 음식처럼 들고 다닌 사람이었다. 대낮에도 술을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내가 전화로 끙끙대면서 업무처리 하고 있으면 팀장은 “이놈이 전화 똑바로 안 받아”, “그게 아니고 인마 아휴” 등의 말을 자주 들어야 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탁업체에 양해를 구하고 대신 전화 접수 업무를 해주는 것으로 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마라톤 하기 이전이었다면 해결하지 못한 채, 체념하면서 그 고통에 얽매여 생활했을거다.)


내가 바뀐 만큼이나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20여 년 동안 장애인 인권 무시는 무한반복 되고 있었다. 인간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공무원 사회에서 계속해서 일하고 있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고, 공허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달리고 달려도 그 공허감은 없어지지 않고 커져만 갔다. 지난 세월 동안 곪을 대로 곪은 상처들을 제때 치유하지 않고 맘속에 묶여 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공무원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삶은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하고, 오롯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만 비로소 공허감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플랜들이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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