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
(22.04.01)
이제 나는 아주 숨어버리고 싶은데 관성대로 살아야겠지. 지금 내가 숨고 싶은 이유는 내 문제도, 책임도 아니니까.
H 일을 공론화하거나 언론에 제보하거나 가장 상위 조직에 신고하려고 하는데 H가 숨어버렸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겼고 엄마는 내가 본 이래로 가장 회복이 절실한 상태고. 모두가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사실 진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나다.
H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억울하지만 부당함을 입증하는 데까지는 피해자가 힘을 내야 해. 엄마는 걱정하지 말란다고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아니니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하면 또 다른 병이 생길 수도 있어. 피하지 않는다면 내가 준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건을 해결할 것이고 계속 피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존중해 줄게. 그렇지만 나는 아주 힘이 부치고 내일 이후까지는 기다려줄 수 없어. H가 회피하는 게 맞지만 사실 H 일이니 그래도 상관없어. 다만 나는 최선을 다해 H를 돕고 싶었지만 계속 피할 거라면 없던 걸로 할게.
선의 상태가 호전되면, 그러니까 운전을 할 수 있고 조금 격한 운동이 가능해지면 당장 서울에 집을 구할 것이다. 온전한 나로 살아가겠다. 설거지도 못하고 쓰레기도 못 버리지만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지금 내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느니 설거지도 잘하고 쓰레기도 잘 버릴 수 있는 온전한 1인 가구 가장으로 살아가겠다.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 우리 가족을 무척 사랑하지만 나는 정말 지나치게 큰 짐을 지고 있다. 만 나이로 스물을 겨우 넘겼다. 그런데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입을 통해 정리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사건들 각각이 단순하지도 않다.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감탄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나를 소진하며 가족을 지키고 있다.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와중 틈틈이 글을 쓰고 원고를 투고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원고를 투고하고 친구들과 만나는 틈틈이 가족들과 감정을 교류해야 한다. 이때도 정신적으로 보호받아야 함이 틀림없다.
이런 내가 자랑스럽지 않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음식물 쓰레기통이 비워져 있고 집 구석구석이 열심히 쓸고 닦은 흔적이 만연할 때 나는 자랑스럽다. 누군가 나를 열심히 보살펴줄 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밤을 새워가며 가족 구성원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하나 분석하고 정리하고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내가 무엇을 했어야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에 이골이 났다. 밤잠 못 이루고 내 환경에 대해 비관할 필요가 없다. 울지 않으려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참을 필요가 없다. 내 일에 울고 가슴 아프면 될 일이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주는 불합리한 부담과 책임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족사를 이야기해도 상관없다. 누군가 모든 사실을 알아도 상관없다. 사실 지금이 되어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어서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없다. 만약 이런 생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때 가서 느끼면 될 일이다.
나를 보호하자. 내 가족의 일은 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