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언어를 남기는 일은 끈덕진 일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도 부채감을 느낀다. 고등학교 때 특별하게 다가왔던 말씀을 많이 남긴 선생님이 있다. 우리는 선생님과 일 년간 토론 수업만 하게 될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이름을 외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너희들이 듣기만 한다면 당연히 난 너희들의 이름을 전부 외워야겠지. 하지만 이 시간에는 너희들이 말을 해. 나는 너희들의 이름을 모를 거야.
언어를 남긴다는 것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나를 빚지는 일이다.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쓸 것인가’. 새삼 늘 자문한다. 어떤 목적 -메시지, 의도-?
그것을 알아야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짐을 지우게 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최소한의 짐만 전달하고 싶어 안달 복걸이었다. 타인이 내가 쓴 것을 읽어주기라도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무엇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평가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춤법이나 문장 구조 등 기술적인 것들에서부터 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묵직한 의도나 메시지까지, 애초에 관통당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보이도록 글을 썼다. 보이지 않는 곳에 글을 쓸 때는, 조각 글이나 아무 의미 없이 감정적이기만 한 날카로운 것들을 기록했다. 굳이 보이면 상처를 입히거나 입을 것들을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글은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인 가구 가장이 되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태도와 주제로 글을 연재할 계획이었다. 애초 내가 소속되었던 가족의 형태가 변한다거나 부동산 사기를 당할 것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이리저리 휩쓸려갔다. 그래도 1인 가구로 살아야지, 하다가도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며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를 찾아 헤맸다.
아직 확실하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좋은 글을 많이 읽고(나쁜 글도 물론), 허술하고 견고한 글을 많이 써보고, 다채로운 코멘트를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고작 1년? 10년? 아마도 평생토록.
좋은 글을 읽었다. 그 작가님의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처음 글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가장 최신작은 감동이 짙게 남았다. (아마도) 초기작부터 빛나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연속적으로 꾸준하면서 동시에 변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비우고 동시에 공명할 수 있는 방을 아주 많이 만들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렇게 들어온 것들을 언어화할 때 독자는 지치지도 않고 눈을 빛내며-마치 작가의 글에 햇살을 받아 만개하는 유리조각이 숨어있듯-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나로 가득한 글은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나를 빼내고, 그다음은 또 빛나는 글들을 읽으며 지평을 밟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앞서간 작가들의 페이지에서 만발하는 순간을 발견할 때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잠시간 숨을 참고 다이어리에 옮겨 적을 것이다. 두고두고 읽어 마음속에서 희석될 때까지. 희석된 것들이 나를 거쳐 새로운 문장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치도록 내 세계를 완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