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아름답다는 말은 마음에 담는 순간 아직도 가슴은 설레인다.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상상이다. 거기에는 조작된 나의 기억도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지나간 추억은 모두가 아름다움으로 포장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픔의 상처가 가득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에 모든 것은 달려 있었다. 지독한 아픔을 가지고 있거나 분노하는 마음을 품고 살고 있다면 인간의 삶은 병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아픔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분노도 용서를 하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머리로 생각하는 철학보다 사람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아픔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분노를 용서하기 위하여 인간은 사유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불행했을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당시에 느꼈던 슬픔이나 고통조차도 그러한 감정의 찌꺼기는 망각의 강에 던져버리게 되고 스스로 살아있음에 대한 대견함으로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의 승화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간은 이러한 감정의 승화를 경험하고 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누구나 첫사랑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산다. 첫사랑이 아름다움으로 남아있지 않다면 이는 감정의 승화를 거치지 못한 결과이다. 단테는 40년에 걸친 평생의 역작인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 그의 첫사랑인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킨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 귀족의 딸이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24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단테는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연대기를 썼다. 두 사람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과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의 본질을 설명하려 하였다.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전해들은 날, 괴로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몇 편의 시를 쓰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지옥편 Inferno〉에서 그의 중재자가 되고, 〈연옥편 Purgatorio〉을 통해서는 그가 닿고자 하는 목표가 되며, 〈천국편 Paradiso〉에서 그를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승화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단테가 완전히 영적인 존재에 몰입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나는 남자로서의 매력을 보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을 갖는다. 여성이 남성에게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어떠한 면에서 느끼는 것일까?’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문득 궁금해졌다. 한편 ‘나에 대하여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여성은 과연 있었을까?’ 그리고 ‘동성에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도 갖게 한다. 나 역시 같은 남자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였었다. 그것은 동성애적 매력이 아닌 같은 남자로서의 하나의 본능적 경쟁 속의 인정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내 자신을 희석시킬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아름다움은 지금도 나에게 성적 매력과 혼돈케 한다. 나의 인생에서 애인이나 나의 아내가 내 사람으로 존재한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내게 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여성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를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아름답다!’라는 감정이 성적 욕구와 분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의 분명한 감정이 참으로 좋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혼자 살아가며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솔직히 지금도 나의 성적 감수성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냥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는 나의 생각도 가끔씩 이러한 성적 정체성으로 흔들리고 있음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나를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따름이다.
나는 한라산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맑게 다가오는 날이면 항상 감동한다. 형상이 주는 아름다움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로 발전하여 다가오는 경험도 드물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귓가를 흐르는 선율도 가끔은 나를 감동시킨다. 물리적 진동의 연속된 떨림은 나의 귀를 자극하는 과학적 논리를 뒤로하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움도 자신의 주관적 자각에서 시작되고 스스로 열려있음에서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렇듯 아름다움에 다가서려는 나의 마음이 중요했다.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외국 곡을 접하며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었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뜻도 모르는 가사를 외우며 내 자신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러한 가사들이 희미해졌다. 게으름 때문에 구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가사들의 구체적인 의미가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해석을 찾아 단어를 꿰어 그 의미를 찾는 일도 새로운 일이 되고 있다. 의미를 알고 노래를 한다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다. 새로운 탐미가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새롭게 찾아 감동을 다시 재현하는 것도 나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현란한 반주에 맞춰 노래했던 그리운 시절의 오래된 그리움도 지금 현실적인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것조차 그리움의 크기를 키우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움도 나에게 감동이 되어 아름다움으로 내 가슴에 젖어 있다.
인간의 비판 의식은 아름다운 작업이 될 수 있다.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개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에 이르기까지 비판은 애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애정이 없다면 이는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만을 표현하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만사에 불만을 갖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과 애정을 갖고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전자는 불안정한 감정의 표현이나 자신을 들어내기 위한 자기과시에 불과한 것이지만 무엇에 비판적 사고를 갖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기반은 보다 바른 것을 향한다는 것이 이유가 되고 이를 통해 아름다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판이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 있을 때 인간은 통합의 미를 경험할 수 있다.
갈등이 통합되면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하는 꿈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꾸는 꿈의 실현은 개개인 하나 하나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다. 인간은 결코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행복에 다가서는 통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파라다이스는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사회다. 인간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든다는 꿈은 불가능한 꿈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꿈꾸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가치를 갖는다. 가슴에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며 산다는 것이 삶을 사는 이유가 된다.
세상은 벅차오름으로 나를 충만케 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새벽바다를 밝게 빛내며 수평선 너머의 붉은 기운을 뚫고 올라서는 태양의 모습이 그러하고 강열한 여름 태양이 남쪽바다를 반짝이며 은빛물결이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남쪽 바다가 그러하다. 검붉게 물들며 사라지는 저녁노을 속에 사라진 아내의 모습과 삶의 슬픔을 함께 토해내듯 했던 슬픔의 격정조차도 아름다움으로 녹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본다. 인간의 추한 모습조차도 그것이 삶을 사는 과정이고 투쟁적인 삶의 노력이라 생각하면 그 역시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저 사람들도 그러한 험한 삶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은 사람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죽는 순간에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음악이 흐른다. 바하의 평균율은 완벽한 소리의 조화를 만들었다. 후대의 음악가들은 완벽한 화성 속에 섞여있는 불협화음의 오묘한 질서를 만들었지만 현대음악은 불협화음의 시끄러움조차 음악으로 탄생시켰다. 나는 황병기의 ‘미궁’을 들으며 톱날의 거친 쇠소리에 내 자신을 던져놓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기괴한 선율 속에 나의 삶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소리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나의 마음을 열면 그것도 무의식 속에 흐르는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안 것이다.
나는 드뷔시의 몽유적인 선율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그의 음악만 한 것도 없다. 많은 종류의 음악이 존재하고 사람마다 자신의 취향을 주장하지만 음악이 갖는 예술적 수준은 그 취향과는 다른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객관의 세계다. 주관적인 자기 취향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예술적 소양을 갖지 못한 채 미술적 요소나 소설, 영화, 음악 등을 자신의 취향의 기준으로 함부로 평하려 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예술적 소양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움에 스스로 열려있느냐는 단순함에 있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오히려 예술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을 나름의 방식으로 지식적인 접근을 하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작위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술을 단순한 감정의 표현방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예술은 삶을 아름다움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삶의 즐거움이란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목적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