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치열한 삶의 서막이었다②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첫사랑은 치열한 삶의 서막이었다②


첫사랑 그녀의 방은 내 방에서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2층에 있는 그녀의 방은 여러 집들의 단층지붕을 사이에 두고 문을 열면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방에 내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어린 소녀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창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수 년 동안 바라보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대한 감정을 일기로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그 사실만을 혼자 간직하는 것이 좋았다.


사랑은 순간의 번쩍임으로 마음을 밝히며 가슴 속에 또아리를 튼다. 우연히 학교를 마치고 탄 버스에 그녀가 있었고 마침 좌석에 앉은 여학생에게 내 무거운 가방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나를 의식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그 후 가끔씩 쓰던 일기장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에 대한 비망록이 되어 있었다. 5년 동안 쓴 일기는 몇 권의 책이 되었다. 편지를 쓰고 부치지 못한 편지도 수십 통이 되어 쌓였다. 내 기억으론 20여장의 장문의 편지도 여러 통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동네 어귀를 들어올 때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항상 가슴이 뛰고 있었다. 행여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녀를 응시하며 무심한 듯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행복감은 나의 사랑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은 혼자만의 일기였다. 그녀를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나의 일기는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기도 하였다. 그 나이에 내가 아는 온갖 아름다운 단어들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표현되는 말에 어색함으로 부끄러움을 갖기도 한다. 일기장에 쓰여진 좋아한다는 표현은 점점 해를 거듭하며 격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녀와의 꿈을 표현한다. 미래를 생각한다. 더없이 황홀한 행복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 자신에 대하여 당연함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시작하고 내 감정의 크기만큼 그녀와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정한 바램과 강구를 반드시 채워주신다!' 이것은 어린 마음 속에 깊은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자리하였다.


나를 마주치게 될 때마다 항상 수줍어했던 그녀는 결국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의 친한 친구는 나를 위해 그녀와의 자리를 주선하였고 나는 5년 동안의 일기와 편지를 함께 건넸다. 다음날,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한다' 확신에 찬 고백을 했다. 사실 그 나이에는 참 어색한 사랑이다. 그러나 혼자 사랑했던 시간만큼 그녀에게도 그러한 고백이 어설퍼 보이지는 않았던 것은 그녀가 나의 감정을 의식한 시간만큼 이해하고 있었다.


19살. 그녀는 18살.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다. 환희.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감. 수십 년이 지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나는 그 순간만큼의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지나간 5년의 시간은 어린 나에게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이제 와서도 그것은 중년의 수십 년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내게 표현해준 수줍은 마음에 내가 부여한 의미를 감당하지 못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신에 찬 미래와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재수를 결심하고 휴학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짧은 만남. 6개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에 비하면 정말 짧은 만남이다. 나의 휴학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잠시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 나의 서툰 이별에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녀의 사랑을 가늠하기도 전에 나는 속단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의 어린 사랑은 현실에 너무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의 사랑은 어떠한 이유로든 깨지지 않으리라는 그러한 믿음만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다가가지를 못했다. 그녀도 결국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려 했던 나의 행동이 결국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분개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참으로 서툰 사랑이었다.


나는 계획했던 공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마음은 나중에 다시 전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것은 옳은 생각이었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만큼 그 나이의 나의 감정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의 편지와 일기를 돌려주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전한 마음을 내 안에 묶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고 했고 나는 당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어린 그녀는 그것들이 당시의 나에게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었음을 몰랐다. 그것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지 못했던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일기장들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당시의 감동을 준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나의 분노는 그녀의 이기심과 자기변명에 실망을 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했지만 어린 나는 오랜 시간을 키워온 사랑이란 감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아집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보다 나만의 사랑 그 자체를 갈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를 만나 나의 오랜 진심들이 불태워진 사실을 두고 마주보고 차분히 얘기할 수 있었다면 여러 상황들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어렵게 연결된 그녀와의 전화통화로 그녀의 결심을 듣고 있다. 그 당시 그녀는 참으로 냉정했다. 그때의 기억은 돌아선 여자의 냉정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어린 여자애의 모습이 아니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나의 진실을 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으로 우리의 만남은 너무도 쉽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그녀의 어린 판단 때문이라 생각하며 진심어린 사랑은 외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삶의 대한 당위의 문제였다. 사람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고, 또한 그에 대한 순수한 노력을 다하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아니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하교 시간을 맞춰 한 참을 기다린다. 그녀를 붙잡고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를 냉정하게 뿌리쳤다. 어느 때는 그녀를 괴롭히는 치한이 되기도 하였고, 그녀는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며 소리치기도 하였다. 그녀의 집에 전화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여 전화를 건넸지만 그녀는 그냥 말도 없이 끊어버렸다. 그녀의 답은 항상 "안돼" "싫어"의 간단한 답이었다. 그사이 나는 그녀의 막연한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녀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은 나를 비참함으로 짓밟았다. 나는 당시 그녀와의 진지한 한 번의 만남을 필요로 하였다.


나는 나의 비참한 상황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더욱이 주위에 많은 친구들로 하여금 나를 동정하게 하고 그녀를 비난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녀가 내게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를 통제할 수 없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비참함에 쌓인 날들이었다. 모든 자존심이 무너지는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내 친구들은 내가 지독히 사랑했던 어떤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한다. 결국 주변 모두에게 삼류 연애소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은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녀의 변명으로 만들어진 기억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잊혀진 기억 속에서도 회한과 아픔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당시에도 대학입시란 것은 절대가치가 되어 있었고 어떠한 이유도 최소한의 가치를 가질 수 없음이 나를 더욱 더 처참하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녀의 최고의 변명은 대학입시가 되었고 나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최소한의 배려도 용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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