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육체의 논쟁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정신과 육체의 논쟁


기원전 600년경부터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사의 논쟁은 2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정신과 육체의 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철학의 산물은 수많은 철학자를 명멸케 하고 고뇌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논쟁은 수많은 고뇌의 흔적을 통해서도 극복되지 못하고, 단지 형상의 구체적 발전과 구체적 작용방식만을 고도로 발전시키며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수 천 년의 역사적 산물인 중국의 사상적 기반이란 것도 형식적 논리의 극단적인 발전과 편협한 사상적 추종을 수도 없이 명멸시켰던 측면이 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오류의 유혹은 단순하게도 편견과 아집일 것이다. 수 천 년의 서양사상사 역시 헤브라이즘의 종교적 규범과 결합하며 한층 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가중시켰다. 육체의 상대적 대상을 그 출발점으로 한 종교적 신념은 형상을 포용할 수 있는 사고의 한계 가능성을 오히려 편견으로 내몰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오류와 편견이 수천년을 지속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인간의 한계성을 증명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개념의 시초는 물질적 사고를 기초로 태동한 것이며, 이것은 물질적 형상을 작용하는 어떤 다른 것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의 고뇌는 내가 '왜 존재하며,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의문에서 시작되어 '왜'를 규명하기 위하여 '어떻게'에 대하여 골몰한 결과, 형상의 물리적 기초를 규명하고 자연과학의 유기적 결합을 발견하며, 이를 세분화하고 전문화하여 극도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인간은 그 스스로의 가치에 함몰되어 물질중심의 사고에 빠져 '정신'이란 개념의 치장만을 남기게 한다. 이것이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의 중대한 오류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편견과 아집은 구체적인 형상을 입고 지면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의 문제와 일치한다.


이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세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은 형상이 갖는 그 한계성을 받아들임으로서 직관적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며 이는 곧 구체적 형상은 어떠한 것의 발현이고 그 어떠한 것이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일종의 에너지인 것이다.


그러면 그 어떠한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또한 형상의 발현이며, 이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 같이 하나이면서 둘이란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곧 인간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며, 형상의 이면을 직관으로 경험함으로서 우주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형상을 입고 있는 인간이 결코 극복될 수 없는 한계성이 그대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인간의 한계성이 극복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의 모순성을 포용하고 있는 것. 이것이 곧 우주적 세계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성은 극복되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형상의 발현으로서의 세계를 다가서는 통로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인도의 정신문명은 일찍이 인식론의 방법적 탐구를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주적 존재원리를 규명하여왔다. 형상은 브라만 즉, 우주적 무지의 현현이며 이러한 세계는 카르마(창조의 힘, 윤회의 원천)에 의하여 변화하고 인간은 요가(실천의 길) 등의 수행방법을 통하여 범아일체를 직관적으로 경험함으로서 브라만과 융합되는 해탈을 득하게 됨을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인간 삶의 고행을 강조하여 왔고, 해탈에 집착함으로서 인간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비하시키기에 이른다. 인도의 사상적 인식은 대단히 뛰어난 것이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최초의 인식 즉 브라만은 형상의 주체이며 그러한 브라만과 인간은 하나라는 범아일체적 인식으로부터 인간의 한계성에 부딪히는 순간 한발 물러서서 보완적 관점을 취하여 인간의 본질적 존재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윤리와 해탈이란 삶의 목표를 만들고 있다. 카르마에 의한 윤회가 존재한다면, 이는 해탈을 하지 못한 영혼이 떠도는 방식이 아니라 형상과 우주적 에너지의 무시간적 순환방식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 과정을 통하여 발현되어진 세계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존재 그 자체로서 스스로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무한한 우주의 티끌에 불과하지만 스스로의 인간은 그 무한한 우주를 자기 속에 담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인생에 주어진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문학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태양계가 우주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있다! 빅뱅이후 우주의 중심으로 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주변의 단순한 물리적 현상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실마리를 찾는 과정들이 인생과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가 된다." 어쩌면 정답은 있지만 인간은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올바른 방향을 찾아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론 보다 빅뱅은 블랙홀을 만들어 공간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공간이 확장되면 이에 대한 균형유지를 위한 현상으로 생기는 것이 블랙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은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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