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걸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인생을 걸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첫사랑 그녀에 대한 사랑이란 것도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의 그리움이나 회한이 없었을 만큼 잊고 살았다. 아마도 먼 옛날에 나는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던 또 다른 삶의 인연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때는 내가 그녀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하였을 것이고, 그녀는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을 헌신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믿고 싶었다.


이러한 단순한 생각으로 나는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녀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스스로 납득되지 않았던 그녀의 선택을 진심으로 존중하게 되었고 나의 오랜 아집에 대한 '모든 것을 떠나보낼 수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나는 나의 마음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놓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의 아내를 온전히 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나와 아내를 갈라놓았다. 1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아내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나를 떠나지 못할 것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후회와 안타까움은 나의 삶 속에 진실과 겸손을 향한 의지로 작용할 것이다. 32세의 나이에 나의 삶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풍족하고 만족스러웠던 모든 것을 잃었다. 부유함도 사랑하는 아내도 삶의 용기와 의욕도 내게 행복감을 주었던 세상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상실감에 스스로를 학대하며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머리는 참으로 명쾌해져서 '왜 세상을 사느냐'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여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도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현실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한다. 진실이 아닌 결과에 대한 요구다. 그것도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유함이 있고 없음에 대한 요구였다. 현대사회가 권력과 돈이 병행하여 가치기준이 만들어져버렸지만 권력이든 돈이든 없는 자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나의 말에 귀기우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조차도 내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 따라 똑 같은 말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거림을 거두지 않는다. 그렇게 반복되어지는 가까운 이들의 변심을 마주하는 것도 삶의 도전이 되었다.


상대에 대한 마음을 먼저 살피게 되고 조심스러워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당찬 주장보다 소심한 중얼거림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를 아프게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있다. 나보다 못한 것에 대한 측은한 마음.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 포기하지 않는 삶의 소망. 나를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한 용서, 주어지는 책임에 대한 최선의 의지..... 그래도 반복되는 현실의 도전은 많은 상처를 내게 안겨준다. 확신에 찼던 나의 삶의 의지마저 다시금 혼돈을 가져오게 하고 낙담과 실망은 나를 슬픔으로 공허감과 외로움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방을 뒹굴다 바라본 창문 너머가 너무도 멀어져 보이는 감상에 나를 묶어놓는 오류를 다시 범하기도 한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한 역설은 뜻하지 않은 긍정적인 결과에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나에게 있어 실연의 아픔은 오히려 절망과 비참함을 이기는 힘이 되었다. 그 시절 상실감에 빠진 감정은 더 이상 이러한 아픔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의미 없는 삶에 대한 무심함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살아가며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박탈감은 젊은 나로 하여금 인생의 한발을 내디딜 의욕도 없을 만큼 처절하게 나를 부숴놓았다. 그리고는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를 바라보게 하였다. 인간의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벽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한계였다. 정복해야하는 절벽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을 요구하는 절벽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었다. 끝없이 솟아오른 절벽의 끝은 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이 그 결과로 당연히 주어지지도 않는다.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다. 세상일이 7할이 행운이지만 그 행운도 3할의 노력이 없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참으로 냉정한 현실이다.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그러나 결국 당신의 삶은 계속해서 당신을 속일 것이다.


나는 내가 확신하고 기대했던 나의 신념들이 세상이라는 현실 앞에 처절하게 깨지는 경험을 되풀이 하여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인생을 걸어가며 세상 그대로의 모습을 고개를 끄덕이며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다양한 실체를 '하나'로 인식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비워나가는 것.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노력인 것이다.


생각보다 인생은 공평했다. 얻은 만큼 상실된 인생이 존재했고, 잃은 만큼 나를 채우는 그 무엇이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유희란 것이 삶을 윤택할 수 있도록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도 터득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도 생긴 것 같다. 그렇다며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걸어가면 될 것이다. 한없이 두리번거리며 지나치는 주변에 대하여 관조하고, 가끔은 가던 길을 쉬어가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면 될 것이다. 가끔 필요에 의해 동냥도 좀 하여 필요를 채우고, 필요한 이에게 내가 받은 동냥을 조금 나누기도 하면 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세상을 살만한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심지어 세상을 이제는 전부 알듯하여 재미가 없다. 인생이 결과가 뻔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삶의 끝은 반드시 보고 싶다. 내가 갖게 되는 필연적인 삶의 희망과 열정이 다시금 실망과 회한으로 마무리될지라도 나의 인생의 끝에 다다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는 마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충년(充年)의 어느날)


어느날,

뿌리를 박고 하얗게 말라버린 나무를 우연히 마주친 순간,

알 수 없는 가여움이 가슴 밑바닥을 치고 올라

측은함을 느끼며 슬픔에 잠기게 된다면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인생의 지나간 알 수 없는 슬픔들이

말라버린 나무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본능이 순수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본능에 투영될 때이다

그러나 본능이 추해지는 것은

욕망이 순수한 본능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그러나, 삶은 그대를 속인 적이 없다.

그러한 슬픔과 분노는

그대의 욕심과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고

삶을 받아들이는 그대의 가슴이 부족한 탓이리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여 보라

‘삶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한 번에 이루려면 어렵다

안되는 일을 무작정 반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실패를 거울삼아 호흡을 가다듬는다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호흡이 길어지면 결국 포기하게 된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를 실천한다는 것은 삶의 노력과 습관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이야기에 감동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병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50년 후 내가 사라진 다음세상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제기하는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삶의 진리는 결국 단순하고 명료하게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어지는 것이다.


이전 21화그리움으로 살다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