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삶의 기쁨 그리고 행복
기쁨이란 살아있음에 대한 육체의 충만함이다.
존재의 만족감, 이것이 기쁨일 것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 속을 지금에 와서 찬찬히 돌이켜 살펴보니,
나는 어느 한 순간의 기쁨들에 대한
아련한 감정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있는 육체의 기쁨,
인간이 태어나고 육체가 성장하여
살아있음이 인식되는 어느 순간부터
기쁨은 너무도 크고 환상적인 감동으로
어린 아이인 나에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러한 감동은 모태 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
설령 그와 같지 않은 탄생일지라도
아이는 그와 같다고 느낄 뿐
현상적 세계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자신의 육체에 엄습하는 환희와 즐거움 등은
어린 생명에게는 너무도 크고 많은 기쁨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그 짧은 기쁨의 순간들은
일상의 흐름 속에 무뎌지고 익숙해져
결국은 어느 순간 아련한 기억 속에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사랑을 하였다.
사랑은 지워져 버리는 기쁨의 대안이 되고
이 새로운 감정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소망을 싹 틔우려 몸부림치게 되지만
종국엔 그 가련한 소망이 욕심을 만들어 애욕만을 남기고
보다 더 큰 공허함만을 남기게 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무엇을 소망하고
이 삶 속에 존재하는 이유를 모른 채
시간을 배회케 하였다.
어쩌면 나는 존재하기 위하여 그 이유를 찾아
그 치열했던 많은 갈등 속을 헤매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감당치 못하는 젊은날의 열정과 결국 타협을 이룬다.
그리운 시절에 띄우는 한통의 편지를 쓰듯....
혹은, 고요한 바다에 멀리 띄워진 조각배처럼...
나의 인생은 고행이었다.
나는 너무도 큰 삶의 기쁨의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오히려 육체의 허망함을 알게 되어
존재와 바램이라는 차이만을 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 답은 단지 살아있다는 그 존재 자체에 의미를 갖을 뿐이었다.
나의 살아있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나의 육체라는 형상은 한계를 경험케 하였고
한계성을 통하여 절망의 극복과 본질적 순응을 인식케 함으로서
종국에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에 접근케 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존재방식은 직관의 세계이다.
이는 개인이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며 표현됨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살아있음 그 자체로서 족하며
인간의 본질적 존재방식의 그 연장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인위적인 방식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형상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투쟁을 갖게 하였고
감정의 순환을 항상 요구받게 하였다.
형상을 통하여 순환의 질서를 알게 되고
감정의 순화를 경험하고
죽음을 통하여 사라짐이 새로운 시작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인 것이었다.
(충년(充年)의 어느날)
저멀리 바다 위로 펼쳐진
수평선을 넘은 시린 하늘이
고개를 들어 뒤로돌아
한라산 능선을 적시면,
나의 인생은
한 점 속에 이슬이 되어
마음 속에 내려 흐른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 자기애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는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만드는 것이다. 웃음 뒤에 숨어있는 진실, 신을 바라보고 기도한다는 것, 결국 자신을 향한 스스로의 약속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가끔 누구나 베품을 소망한다. 이러한 마음을 평생 가져가는 것도 인간의 끝없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베품의 추억은 인간 자신을 뭉클함으로 기억하게 하는 영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복수초의 꽃말이 영원한 행복, 슬픈 추억이다.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다. "슬픈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의미가 풀릴까? 이것이 역설이다. 부부란 것이 절실했던 기대감이 현실이 되면 생활이 된다. 잊었던 처음을 되새기며 스스로 멋 적었던 부끄럼은 이미 추억 속에 당연함으로 사라져 버린다.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30년을 혼자 살아온 나에게 ‘아직도 절실했음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