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with me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두 사람

by 다크브라운

희망의 결이 어긋난 자리에서

1.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낯을 가리거나 무뚝뚝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은 정중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피하진 않았으며, 필요한 경우엔 꽤 성실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편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무엇에도 너무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쪽의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든 될 대로 두자는 태도, 결과가 어떻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의 일상 깊은 곳에 깃들어 있었다. 처음엔 그 무심함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매사를 부딪혀가며 배우는 타입이었고, 자주 피로했으며,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모든 것을 조용히 다루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조용한 것이 아니라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여러 번의 이직을 거쳐 한 번의 창업 실패를 겪었다. 스물아홉에야 지금의 회사를 얻었고, 그 이후로는 예측 가능한 월급과 정해진 루틴을 ‘최선의 질서’로 삼았다. 자주 말하곤 했다. “그냥, 내 일 해내고 퇴근해서 밥 먹고 누워서 드라마 보면서 하루 끝내는 거면, 그걸로 됐지 뭐.” 그는 자기 삶에 욕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무언가를 기획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차이가, 삶을 ‘견디는 방식’과 ‘구성하는 방식’ 사이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작고 조용한 목표를 세우는 걸 좋아했다. 책 한 권을 다 읽기, 계절이 바뀌기 전에 수영을 배우기, 아침에 10분만 일찍 일어나 명상하기 같은 것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작고 느린 일들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붙잡고 있었다.


2.그녀는 어느 날, 오래전부터 관심 있던 분야의 온라인 강의에 등록했다. 가격은 200만 원이었고, 적지 않은 비용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결제 문자를 훑어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거… 사기 같은 거 아니야?” 말투는 조심스러웠고, 걱정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단단히 굳은 벽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진지하게 선택한 세계에 대해 ‘위험’이라는 스탬프를 찍었다.


그녀는 왜 이 강의를 선택했는지 설명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말했다. “나는 네가 너무 힘들어질까 봐… 그냥, 요즘은 뭐든 조심해야 하잖아.”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는 점점 더 그녀 곁에서 멀어질 자신의 모습을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애정처럼 들렸지만, 그녀는 서서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항상 조심하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 순간, 마음속에서 말이 차오르다가 멈췄다. ‘그냥 모르겠다고 해줘. 그 말이면 될 걸, 왜 늘 틀렸다는 쪽에서 묻는 걸까.’ 그 문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물과 함께 넘겨졌다. 그는 티슈를 건넸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는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말하지 않게 되었다.


3.며칠 후, 그녀는 독서모임에 등록했다. 수강료는 40만 원이었다. 그가 말했다. “책 읽는 데 돈이 왜 필요해? 그냥 도서관 가도 되잖아.” 조롱은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그 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타인의 언어와 부딪히며 자기를 새로 쓰는 경험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변화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상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세계엔 ‘지금 이대로가 나쁘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었고, 그녀의 세계는 ‘지금이 충분하지 않다면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 당연한 윤리였다. 그가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계는 옳고 그름보다 같은 리듬을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의 리듬은 너무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작게 줄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해심 깊은 연인이었지만, 이해만으로 함께할 수 없는 시간대가 존재했다. 감정이 고갈된 게 아니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랑만으로는 공유되지 않는 삶의 속도와 리듬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는 일에 더는 자신을 소모하지 않기로 한 것이, 그녀의 이별이었다.


4.이별은 조용했다. 그는 붙잡지 않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에 남은 채 그녀를 놓아주고 있다는 걸.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는 그 나름의 논리와 두려움과 피로가 있었고, 그는 그 삶을 견디며 나름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한때 우연히 같은 강가에서 잠시 머물렀던 것뿐이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강줄기를 따라 걷는다.


물은 말이 없고, 길은 언제나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흘러야 할 방향을 조용히 묻고 있다.


흘러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물컵을 비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말이 줄었고,


그가 한참 뒤늦게 알아챘을 땐, 이미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가 머물 수 없는 세계로 향하는 사람을


끝내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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