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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훈의 중국평론 Jul 08. 2022

‘탈중국’ 멀티버스

동업이라는 것을 하다보면 당연히 갈등이라는 것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타협을 통해 우위를 결정하거나 대립을 통해 결별이라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갈등이 그저 없던 일이 되어 이전의 천진무구하던 관계로 돌아가는 일은 추호도 없다.


그런 상태가 만약 있다면 그건 잠시의 휴지기일 뿐이다.


우리는 중국과 이러한 갈등상태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한한령, 혐중과 같은 형태로 격돌 중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아무리 봐도 우리가 먼저 약점 잡힌 형국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높은 대중국 경제 의존도와 중국이 지키고 있는 대북 협상 채널로써의 역할 때문이다.


상대는 우리와의 갈등 과정에서 우리가 아쉬워하는 부분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들은 치사하고 노골적으로 우리의 약점을 쥐고 흔든다.


“과거로 회귀하고 싶지 않으면 꿇어!”


꿇기도 싫지만 당장 맞서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보니 최근 우리 정부의 ‘탈중국’과 관련하여 의견도 양극단으로 갈린다.


과거 문재인 정권의 대중국 노선을 ‘친중’으로, 현 윤석열 정권의 노선을 ‘반중’으로 갈라놓고 우리끼리 의견 싸움에 한창이다.


오호라... 이건 아니지.


이것이 의견 당사자 개인의 사정이라면 이리도 단순하게 한쪽에 가져다 놓고 볼 일인가.


자기 자식도 이쁘다 밉고, 남녀관계도 엎치락뒤치락하는데 뭐 그리 간단하단 말인가.


노자•老子의 훌륭한 사상 중 대표적인 단어로 ‘부쟁•不爭’이 있다.


상황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 ‘경쟁하지 않는다’, ‘대립하지 않는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물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에 가장 도에 가깝다.


여기서의 다투지 아니한다함(不爭)은 싸움을 피하거나 굽힌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물과 같이 타고 넘어 흐르며 또 다툼 자체를 초월(無爲)한다 함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개싸움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정부가 뱉어놓은 ‘탈중국’이 만약 노자의 ‘부쟁’과 같다면 이는 정말 대단한 칼날이고 엄청난 물줄기이다.


“너희가 항상 우리에게 목줄을 매려하고 우리를 다루려하니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아쉬움을 스스로 버리고 해방하겠다.”


물론 이러한 셀프 해방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통해 둘의 관계를 처음의 수평으로 돌리고 다시금 마주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만약 ‘탈중국’ 선언 이후, 중국의 맞수에 종속되거나 중국과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지금의 정부 생각이 철부지 아이의 아양과 앙탈 수준이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같은 말, 다른 의미가 두 개의 결과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이 어떠하건 내 나라, 내 민족의 수준이 만들어낸 결과이기에 겸허히 받아들이려 한다.


K뷰티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K푸드의 위상을 알고 싶다면,

왕홍 마케팅의 진실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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