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융, 아들러는 ‘리비도’를 각각 어떻게 해석하였나?
1|프로이트 – 리비도는 ‘생의 에너지’다
욕망은 ‘무의식’이고,
리비도는 그 욕망을 추진하는 원시기관이다.
‘성적 충동’은 리비도의 시작점이며,
‘모든 문화와 윤리, 심지어 죄의식’마저
그 ‘억압’의 부산물일 뿐이다.
리비도 = 에로스(생명충동)의 연료
‘성욕은 억압’될수록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다.
“예술, 종교, 철학“ — 모두 리비도의 변환된 형상이다.
2|융 – 리비도는 ‘우주의 흐름’이다
프로이트가 그것을 성에 고정했다면,
융은 그 리비도를 확장했다.
그것은 단지 성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움직이는 힘’.
물과 같고, 꿈과 같고, ‘신화’와 같다.
리비도 = 상징의 에너지 / 자아를 초월하는 흐름
개인의 무의식이 아니라 ‘집단무의식’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자기실현(Self-realization)도 결국, 리비도의 정렬이다.
3|아들러 – 리비도는 ‘지배욕의 그림자’다
욕망이 곧 성적이라는 전제를 깨뜨린 자.
그는 리비도를 우월감의 추동력으로 재해석했다.
*성욕보다 더 근원적인 건 ‘열등감’*이며,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배’하고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한다.
리비도 = 권력욕(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욕망은 사랑이 아니라, ‘영향력’에 있다.
욕망은 ‘욕망을 가장한 사회적 전략’이다.
그러니 묻는다.
너의 리비도는 지금,
무엇을 통해 흐르고 있는가?
‘쾌락’인가?
“확장”인가?
‘지배’인가?
혹은 —
그 모두의 얼굴을 바꿔 쓴
너 자신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