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말썽인 호흡기도 살짝 더 안 좋은 것 같고, 비도 많이 와서 번거로우니 집에 있을까 고민해 본다.
그러나 이렇게 주저앉은 날을 돌이켜볼 때,그때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침에 정신을 깨우기 위해 마시는 커피가 결정을 가른다. 가지 않는 날은 아침 일찍집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가기로 한날은 카페 개장 시간까지 꾹 참는다. 참은 게 아까워서 나를 일으킨다.몸안의 부족한 카페인 농도가 나를 서둘러서 나가게만든다.
우리 동네 카페의 개장 시간은 9시이다. 회사원들이 많은 번화가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니면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경우가 드문데, 여기는 비교적 일찍 문을 연다.
3층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카페는 공간도 넓고 쾌적하며 루프탑까지 있는 전망 좋은 공간이다. 빵집과 계산대는 1층에 자리 잡아서 2층에 올라오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이곳의 2층은 천장이 높고 밖으로 향한 벽면 전체가 다 창이어서 그 개방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이 좋다. 오늘처럼 비라도 오는 날이면 창밖의 나무와 중학교 운동장까지 촉촉해져서 운치를 더한다.
9시 정각에 문을 밀고 들어오면 대부분의 경우 내가 첫 번째 손님이다. 2층은 안쪽 벽 쪽에 긴 벤치형의 푹신한 의자가 있어서 혼자 작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쪽에 자리 잡는다. 소그룹이 앉아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작은 원형 테이블과 여럿이 격의 없는 회의라도 할 수 있는 긴 대형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있다. 그중에 나의 자리는 벽 쪽 구석 자리이다. 그곳에 앉아서 좋아하는 영화의 줄거리도 요약하고 내 생각도 정리해서 글을 쓴다.
예전의 글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적이 있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물론 이것은 의식주가 해결된 사람의 배부른 소리이다. 스스로 벌어먹고살아야 하거나 가족을 부양하거나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람의 경우 당연히 그것이 최우선 순위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충족되고 그 기간이 끝나고도 돈에 매여 자신에게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것 같다. 돈은 어떻게든 벌 수 있으나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러니 먹고살 걱정이 없으면서도 실용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집에 있으나 카페에 있으나 객관적인 시간은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은 온전한 시간이다. 조각난 시간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몰입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시간이다. 부엌에서 인기척이 들릴 때 혹시 가족이 배고픈가 신경 쓰고, 저녁거리로 무엇을 사러 가야 하나, 날이 좋으니 세탁기를 돌려야 할까 하는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은 나에게 중요한 일을 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에게 온전한 시간을 허락하면 허드렛일은 오히려 더 능률적으로 몰아서 빨리 할 수 있고 가족들과도 퀄리티 타임을 가질수 있다.
카페의 소음은 집안의 소리와는 달라서 모르는 사람들이 내는, 내가 신경 쓰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소리는 나에게 영향을 많이 준다. 수시로 내 마음에 틈입한다. 애써서 만든 나의 고유한 세계를 부순다. 그래서 나는 절간같이 조용한 집을 놔두고 카페로 달려간다.
거기서 나는 예전에 보았던 좋은 영화를 꺼내서 곱씹으며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나를 불편하게 했던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때를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정지 화면에서 그때는 못 보았던 것을 찾아낼 수도 있고 큰 그림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작업들이 나에게 시간을 무한대로 늘려주어서 영원을 맛보게도 한다.
비를 뚫고 카페에 오기를 잘했다. 오늘도 1등으로 카페에 입성해서 거의 30분 동안 공간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전면창으로 비 오는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고, 맛있는 커피를 마실수 있었고,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카페 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카페를 전전하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아침에 일찍 여는 카페가 많지 않은 것도 알고 있고, 공간감과 전망까지 좋은 카페가 드물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진 카페 근처에 살아서 다행이다.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뒤늦게라도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다 이 카페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에세이를 모아놓은 브런치 매거진 ‘나무 아래서 나누는 이야기’라는 제목이 이 카페의 이름을 풀어서 만든 제목이다. 이런 멋진 공간에서 시간을 누릴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맙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