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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Aug 14. 2023

나를 살 맛나게  하는 친구들

"아임 그루트"와 "인 덴 볼켄"을 알아듣는 사람들

     

춘추 시대의 백아라는 거문고 연주의 달인에게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연주를 하면, 종자기가 듣고 있다가 우뚝 선 태산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가 하는 소리를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일컬어 ‘知音’(지음)이라고 한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그의 묘지에서 마지막으로 거문고를 연주한 후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음이 없으니 연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이다.

     

나에게도 이런 친구들이 있다. 학창 시절에 그 친구들과 그저 서로 눈빛만 교환해도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아서 배를 잡고 웃었던 적이 많았다. 지금까지 몇십 년 우정을 이어오며 계속 소통하니 그들이 모두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몇 마디 말속에서 친구의 마음이 다 읽힌다. 무엇이 힘든지, 기쁜지, 슬픈지가 보인다. 이 정도면 우리도 지음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카톡에다 바쁠 때 급해서, 또는 노안 때문에, 또는 심란해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내 친구들은 정말이지 최고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슬픔의 삼각형’에서 요트에 탄 여자 승객 중 뇌졸중에 걸려 몸이 마비되고 언어 장애가 생긴 인물이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인 덴 볼켄”인데 독일어로 "구름 속에서"라는 뜻으로 그녀는 물론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그 말 밖에 못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다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통역도 해주고 필요한 물건도 가져다준다. 그는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아기가 어릴 때도 당연히 말을 못 한다. 조금 지나면 옹알이를 하는데 엄마나 가까운 가족들은 옹알이하는 아기와 대화를 한다. 얼추 알아듣고 대답해 주기도 하고 감정의 교류를 하기도 한다. 말 못하는 아기와 대화를 하며 아기를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어른이 될 것이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너무 귀여운 캐릭터인 그루트의 유일한 대사는 “아임 그루트”이다. 그대로 풀이하면 ‘나는 그루트이다’이지만 그는 모든 상황에서 이 말만 한다. 물론 말투와 문장부호와 소리의 크기는 때마다 완전히 다르다.

친구 로켓은 그루트의 말을 100% 이해하고 대답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통역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도 점점 그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 그루트가 우주선을 제시간에 몰고 와서 다른 대원들을 쳐다보며 “아임 그루트”라고 하면, 네뷸라가 “그래 너 멋져”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나중에 들어온 가모라와 퀼이 싸우자 그는 또 “아임 그루트”라고 말하고, 가모라는 못 알아듣고 “네가 그루트인 거 다 알아!”라며 화를 내지만, 퀼은 “그래 너는 화물칸에 가 있어도 돼”라고 대답한다. 그러던 가모라도 나중에는 그루트가 쭈뼛쭈뼛 다가와 “아임 그루트”라고 하자, “나도 너와 함께라서 좋았어”라고 대답하는 경지가 된다.

감독은 영화에 몰입한 관객들도 나중에는 그루트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영화 말미에 그루트가 “너희 모두를 사랑해”(I love you, guys.)라는 말을 하는데,그것은 그가 실제로는 “아임 그루트”라고 말했지만 그루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객들그말을 그렇게 알아듣는다는 이기 때문이다. (그루트는 다른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진실한 친구로 지내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 표면적인 대화 아래 깔린 상대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메시지가 뭉클하다.

     

살다 보면 “나는 괜찮아”가 괜찮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안 와도 된다는 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을 안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는 지나친 예단일 것이지만,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이라면 말을 떼기도 전에 진심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주어서 힘들때도 살 맛나게 해 주었던 친구들을 위해, 나도 친구들이 괜찮다고 해도 달려가서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며 살 맛나게 해주고 싶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겠는가.

세상에 아직 나와 친구들이 남아 있을 때, 열심히 나의 거문고를 들려주고 그들의 연주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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