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이창’,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 그리고 이 영화 키에르 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공통점은 훔쳐보기이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여러 목적을 가지고 망원경으로 맞은편 건물의 상대방을 마음껏 몰래 지켜본다. 요즘 같으면 이런 행위는 스토킹 범죄로 잡혀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소재를 단순한 잣대로 범죄를 미화하는 영화라고 비난한다면 예술은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소재의 예술 작품에서 훔쳐보기는 은유이고 거기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과 예술과 영화는 다른 사람의 세계를 훔쳐보는 행위이다.(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대놓고 훔쳐보기를 표방하기도 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성장한 19세 청년 토메크는 우체국 직원이 되어 친구 집에 머물고 있다. 친구는 평화유지군으로 시리아에 파병되었고 오래전부터 맞은편 아파트의 여자를 쌍안경으로 훔쳐보았는데 그것을 토메크에게 물려주었다.
처음에는 토메크도 그녀의 자유분방한 연인과의 관능적인 애정 행각을 즐기기 위해 훔쳐보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제는 그런 장면은 보지 않고 그녀의 일상을 주로 보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마그다이다. 그녀를 더 잘 관찰하기 위해 그는 설비실에서 성능 좋은 망원경을 훔치기까지 한다.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자명종을 울리게 하고 식사도 망원경 앞에서 하면서, 그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그녀는 늘 우유를 마신다), 어떤 활동을 하는지(그녀는 아마도 태피스트리 비슷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같다) 등등을 관찰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녀의 애인이 와서 둘이 같이 있으면, 가스 회사에 그집에 가스가 샌다고 신고를 하여 수리하러 오게 하여 그들을 애정생활을 방해한다. 어느 날 늦게 귀가한 그녀가 길에서 애인과 싸우고 들어와서, 우유를 꺼내서 식탁에 두었다가 실수로 쏟고 엎드려서 우는 장면을 보고 토메크의 가슴도 찢어진다.
토메크는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가짜 통신환 통지서를 위조하여 그녀의 편지함에 넣고 그녀가 우체국에 찾으러 오게 만든다. 그러나 우체국에 온 그녀가 사기꾼으로 오해받아 모욕을 당하고 쫓겨나자 그녀를 쫓아가 자신이 한 행동들을 고백한다.
그의 행동을 인지한 여자는 보란 듯이 자신의 방의 가구를 토메크가 보기 좋은 위치로 바꾸고 애인과의 정사를 보여주다가 애인에게 그 일을 일러바친다. 뛰어나온 애인은 맞은편 아파트에 대고 스토커 나오라고 소리치고, 나온 토메크를 때린다.
다음날 토메크와 마그다는 카페에서 만나는데 1년이나 훔쳐본 이유에 대해 그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에 사랑 따위는 없고 섹스가 전부라며 순진한 청년을 놀리고, 자신의 집에 그를 초대한 다음 그를 유혹한다. 성적 경험이 전혀 없는 토메크는 신체적으로 흥분하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며 집을 뛰쳐나오고 돌아와서 자살을 시도한다.
순수한 청년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녀는 종이에 “돌아와, 미안해.”라고 써서 창에 붙이지만 반응이 없고 그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는 퇴원해서 누워 자고 있고, 그의 방에 들어간 그녀는 그의 망원경으로 자신의 집을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이 애인과 싸우고 상심해서 우유를 쏟고 엎드려서 울고 있던 날, 토메크가 옆에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는 장면을 본다(상상한다). 사랑이었다.
토메크가 그저 관능적인 여성의 애정 생활을 엿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대상이 누구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른 영역에서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그저 포르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메크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오히려 이제 애정 행각은 보지 않는다. 그녀가 중요한 것이다. 그냥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마그다’라는 유일하고 특별한 여성이 좋은 것이다.
오래 바라볼수록 많은 것이 보인다. 그녀의 예술세계, 그녀의 상처, 독특한 표정등이 그의 마음에 각인이 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화가는 초상화를 그리느라 오랜 시간 한 여성을 바라보다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도 자신을 그려주는 화가를 같은 시간 동안 오래 바라보다 사랑하게 된다. 둘은 첫눈에 감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바라본 후에 마음까지도 들여다보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 묘사된 것으로 보면 마그다는 그다지 현숙한 타입의 여성이 아니다. 남자 친구도 자주 바꿔가며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순수한 사랑도 믿지 않는 닳고 닳은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메크는 그녀를 오래 지켜보고 그녀 마음에 존재하는 순수한 부분을 알아본다. (물론 ‘마그다를 지켜보는 토메크’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순수한 마음도 끌어낸다.)
결국 마그다는 그의 망원경을 통해(토메크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자신이 상처받았을 때 그가 진심으로 건네었을 위로를 본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그녀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 영화의 한 축과는 별개로 이 작품은 영화란, 또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건 문학이건 미술이건, 예술은 어떤 대상을 오래 지켜보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표현한다. 그중에 영화는 특히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행위가 기본이다. 불을 끄고 맞은편 건물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행위와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보는 행위는 누가 보아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많은 평론가들이 영화와 관음의 유사성에 대해 다루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는 실제 인물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영화는 창작된 가상 인물을 들여다보는 것이 차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작품 속 인물들은 모르지만 관객은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것(호의에서 나쁜 음모까지도)을 알고 있으므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관객은 토메크가 순수하다는 것을 아니까 마그다가 그것을 의심하며 그를 타락시키려고 할 때 안타깝다. 관객은 토메크의 순수한 마음을 믿고, 토메크는 마그다의 순수한 마음을 믿는다.
예술에서 누군가가 어떤 입장에서 다른 인물을 들여다본다고 하면, 현실에서도 나를 들여다보는 누군가를 상상할 수 있다. 크게는 나를 지어낸 작가(창조주)이고, 작게는 나에게 관심을 가진 어떤 사람일 것이다. 그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면 즉, 영화 속 마그다처럼 토메크의 망원경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랬을 때 큰 그림이 보이거나 상대방의 마음이 보인다면 구원과 화해와 사랑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의 악의와 저급한 욕망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