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하다
매력적인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가 귀속을 간지럽히면 성가신 실제 연인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사만다라는 AI는 영리한 데다가 나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예측해서 제시한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AI와 연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영화가 과연 사람 간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인공지능인 기계와의 사랑의 가능성을 그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데오도르는 내성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만, 상대방의 다른 점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별거 중인 아내와도 서로 다른 점을 극복하지 못해서 헤어졌지만 아직 과거에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있고 이별의 이유도 이해하지 못해서 선뜻 이혼 서류에 사인도 못해주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다른 사람의 기념일 편지를 대필하는 일인데 감성적인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훌륭하다는 평을 받아왔고, 그가 몇 개의 정보만으로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유추해서 쓴 편지들은 꽤 인상적이어서 의뢰한 사람들이나 수령한 사람들이 감동할 수준이었다.
이런 개인사를 가진 주인공이 아내와 별거한 후 인공 지능 시스템에 접속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가 스스로 제공한 데이터와 예전부터 그의 컴퓨터 안에 있었던 정보를 모두 가진 인공 지능 시스템의 맞춤 서비스가 시작된다. 그와 인공 지능 사만다는 모든 일상을 공유하고 심지어 길을 걸어갈 때도 대화한다. 좋은 것을 보면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으로 그녀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그의 컴퓨터에 내장된 스케줄을 알려주고 보내야 할 이메일도 알아서 처리해준다. 심지어 그녀의 명령을 이어폰으로 듣고 수행할 아바타 인간을 보내 그의 성적인 요구를 들어주기까지 한다.
만족한 일상을 보내던 데오도르는 아내와의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위해 아내를 만났고 그가 사귀는 대상이 운영 체계임을 고백한다. 아내는 화를 내며 서로 맞출 생각 없이 순종적인 아내를 원하더니 결국 기계를 상대하냐고 비난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스템과의 접속이 끊기고 패닉 한 데오도르는 최근에 거리의 행인들이 모두 걸어가며 각자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의 사만다라고 믿었던 인공 지능이 수천 명의 사람에게 같은 성격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다. 결국 사만다와의 관계는 끝난다.
허탈해진 데오도르는 새로운 여성과 데이트를 시도하지만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책임감을 갖거나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이 없고 이를 알게 된 상대방 여성은 분노한다.
데오도르는 그가 자기의 세계와 똑같은 상대와 동어반복을 하는 것 이외에는 전 아내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새로운 여성을 자신의 인생에 들여놓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문제를 깨달은 데오도르는 전 아내를 생각하며, 그녀 덕분에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한 것이 고맙고 가슴 한쪽에 그녀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편지를 쓰고, 오랜 친구 에이미를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도 듣고 그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진짜 관계를 시작한다.
나도 모르는 나의 성향까지 모두 섭렵한 시스템이 나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이다. 중매 사이트 알고리듬에서 매칭 한 커플이 서로 성향이 잘 맞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인데 하물며 계속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하는 인공 지능이 어떤 사람의 기호에 꼭 맞는 패턴으로 반응하기는 더 쉬울 것이다. 목소리도 싫으면 허스키한 스칼렛 요한슨에서 낭랑한 다른 여성으로 바꾸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내성적인 데오도르는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는데 그것을 표현을 못하다가 결국은 관계를 망친다. 그러나 문제는 데오도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못마땅할 뿐, 왜 못마땅한지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특정 플랫폼에서 개인의 소셜 미디어의 정보를 가지고 음악이나 상품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예측해서 꼭 맞게 제시하는 것을 볼 때 알고리듬이 나 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데오도르 같은 내성적 성향의 사람은 자신의 데이터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예술 활동들이 그런 작업들이고 글을 쓰는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서 내성적인 주인공 데오도르가 자기의 내부 세계를 인공 지능에게 이야기하며 외부화시키는 작업과 그가 자신의 데이터를 가진 사만다의 목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세계에 대해 듣는 것이 그에게 치유 작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관계의 본질은 한 인간이 타인과 만나 변화하는 것이다. 즉, 관계에는 타인의 존재가 필수이다. 변증법적으로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가 반응하여 새로운 결과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자신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그것은 성장과는 거리가 먼 동어반복이거나 똑같은 유전형질만을 전달하는 무성생식 같은 것이다.
결국 상대방이 기계냐 인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자신의 세계만을 고집할 것이냐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만다의 반응과 대화 내용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데오도르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이전에도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인생에서 혹은 결혼에서 실패를 한 사람이므로 일차적으로 인공 지능 사만다와의 대화(결국은 혼잣말)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이차적으로 사만다와의 파국으로부터 관계에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필요함을 느끼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AI와의 대화가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데오도르는 대학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에이미와 관계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녀는 전남편이 그녀 자신과의 사소한 차이를 존중해주지 않아서 그와 결별했다. 전남편은 에이미를 자기식대로 조종하려고 했는데 사실 데오도르의 결혼생활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제 성숙해진 데오도르는 그녀를 이해하고 그와의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 준비를 마쳤다. 사람들이 준 몇 가지 정보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었으나 과거에는 단편적인 정보를 그의 입맛에 맞게 연결해서 의미를 찾았다면 이제는 타인의 세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게 성숙하였다.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다르지만 아름답고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고 변증법적으로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아내인 캐더린에게 쓴 편지는 그의 변화를 보여준다.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 해서 미안해.
당신 덕에 지금의 내가 있어.
내 안에는 늘 당신이 있어.
고마워.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