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전적인 방식의 삶이 없어진 미래의 어느 시점, 줄기세포와 자신과 같은 유전자 돼지의 장기를 이용할 수 있는 신인류는 무한한 시간을 양도받아 영생을 할 수 있게 되고, 마지막 고전적 인간 니모는 ‘최후로 늙어 죽는 자’로 117세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면서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기억을 소환하고 기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들려준다.
그의 삶의 갈림길에서는 경로가 달라지는 여러 중요한 선택지들이 있었고, 각각의 선택을 했을 때 서로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데, 그는 모든 각각의 인생을 다 떠올린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 맞이하는 중대한 선택의 고비는 어린 9살의 니모가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아빠 중 한 사람을 선택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와 살게 되면 새아버지의 딸인 안나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아빠와 살게 되면 건강이 안 좋아진 아빠를 간호하다가 소설가가 되고 다른 여성 앨리스와 진을 만나게 된다.
엄마와 살게 된 니모가 전학한 학교에서 안나를 만나 해변에서 앉아있을 때 안나가 다가와 같이 수영하자고 하는데 “멍청이들과는 수영하기 싫다”라고 하면 안나가 재수 없어하며 니모와 멀어져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나중에 니모는 그녀와 그자녀들을 길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수영할 줄 모른다”라고 하면 안나도 같이 해변에 앉아 니모와 이야기하며 친해진다. 엄마가 재혼한 새아빠의 딸인 안나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들이 또 이혼하자 둘도 헤어지게 되고 니모는 안나를 기다리며 수영장 청소부가 된다. 청년 니모가 기차역에서 노숙자에게 동전을 주고 지나가면 안나를 못 만나지만, 노숙자가 쓰러져있는 것을 도와주느라 시간을 지체하면 그때 지나가던 안나와 재회한다. 니모와의 재회를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안나지만 그녀는 사랑을 확신할 수 없어 다시 헤어지고 둘은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한다. 안나에게 전화하려 했는데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에 마침 떨어진 빗방울에 숫자가 번져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니모는 거의 노숙자처럼 등대 근처 벤치에 누워 하염없이 안나를 기다리게 된다.
아빠와 살게 된 경우, 니모는 병이 든 아빠를 간호하면서 소설을 쓰는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댄스파티에서 만난 엘리스에게 호감을 갖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앨리스를 찾아갔을 때 짝사랑 대상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면 사고가 나서 식물인간이 되고, 그전에 그녀에게 가서 고백이 받아들여지면 앨리스와 결혼하며, 고백을 거절당하면 홧김에 진을 만나서 결혼하게 된다.
앨리스와 결혼한 경우 결혼식이 끝나고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다가 유조차에 부딪치면 그녀는 죽고, 아니면 둘이 세 명의 아이들을 낳고 살 때도 있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니모와 결혼했기 때문에 불행하고 우울하여 결혼 생활 내내 니모를 힘들게 한다. 그 경우 그녀는 가족을 놔두고 집을 나간다.(앨리스는 나중에 첫사랑과 우연히 마주치지만 서로 알아보지도 못한다.)
앨리스 대타로 결혼한 진은 안정적인 여성이지만 니모가 그녀에 대해 정열이 없기 때문에 삶이 답답하고 지루하다. 결국 남은 가족을 위해 재산을 남기고 니모는 죽는다.
소설가 니모가 쓴 화성에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SF소설 속에서, 니모는 동면에서 깨어나 앨리스의 유골을 화성에 뿌린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우주 정거장에서 안나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운석 충돌로 같이 죽는다.
앨리스가 고백을 거절한 뒤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식물인간이 된 니모는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서 자신을 간호하는 사람들의 냄새의 변화만을 느끼며 시간을 보낸다.
한편, 티브이 과학 프로그램에서 강연을 하는 과학자가 된 니모는 안나와 커플인데 일찍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길에서 새를 피하려다 차가 미끄러져서 강에 빠져 죽게 된다. 조금 늦게 돌아가는 경우는 먼저 떠난 동료가 죽게 되고 그의 장례식에 갔을 때 안나가 그의 부인이다.
요약하면, 니모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세 여성들은 빨강과 노랑, 파랑으로 상징되는 정열적인 안나, 안정적인 진, 그리고 우울한 앨리스이다. 세상에서 혹은 소설속에서, 이들과 여러 방식으로 연결되었을 때 각각 다른 직업을 갖고 각기 다른 자녀들을 낳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니모에게 계속 더 기억해내라고 재촉한다. 영화에서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거대한 컨테이너들을 바다에 빠뜨리는데 그것은 잠재적인 기억의 덩어리들의 비유이고 니모는 그것들을 물속에서 즉,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려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을 다 기억한 니모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여 그날이 그의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며 “안나”라고 말하고 눈을 감는다.
기자가 질문하듯이, 이런 일들이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며 어떤 것이 니모의 삶일까?
세상에 모든 길을 다 걸어본 사람은 없다. 갈림길에서 한쪽 길을 선택하면 다른 쪽 길은 그저 아쉬운 가능성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이 너무 아쉬워서 사람들은 멀티버스를 고안해내거나, 이영화에 나오는 영생하는 신인류처럼 어떤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게 무한한 시간을 준다. 모두 다 걸어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어떤 길도 걷지 않고 두 길을 상상만 할 수도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가능성이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경우 다 진정한 삶이 아니다. 다른 세상이 있거나, 시간의 제약도 없거나, 선택도 없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럴 경우 니모는 아무도 아니다. 미스터 노바디이다. 실제 인생에서는 기회가 한 번뿐, 싫어도 받아들이고 간다.
영화는 천사의 실수로 인해, 니모가 과거뿐 아니라 선택에 따른 미래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설정을 한다. 이 설정은 관객이 니모가 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삶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영화 속 9살 니모가 극장에서 자신의 미래의 삶을 영화처럼 보는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100살이 넘은 노인 니모의 회상은 사실 9살의 니모가 자신의 미래를 기억(상상)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노인은 니모의 상상일 뿐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눈을 감고 9살의 소년의 시간으로 뛰어 들어간다. 시간의 흐름과는 역방향의 빅 크런치가 일어난다. 깨진 꽃병은 다시 붙고 이혼한 부모의 예전으로 돌아가 사이가 좋아진다.
다시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하는 니모의 삶이 시작된다.
살아보기 전에는 앞날을 몰라서 선택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삶을 다 살아본(상상해본) 니모도 결과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을 하지 못한다.
니모의 부모가 서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낙엽 때문에 우연히 사랑에 빠진 것처럼, 결정을 위해 동전을 던졌는데 놓쳐서 동전이 하수도에 빠지는 바람에 앞면인지 뒷면인지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니모도 기차역에서 아빠와 엄마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철로 건너편으로 뛰어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연을 선택한 것이다. 그곳에서 낙엽을 주워 하늘로 날리고 그 낙엽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등대 근처의, 노숙자 니모가 있는 벤치 옆에 온 안나의 얼굴에 떨어진다.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나서 사랑을 확인한다.
영화 첫 장면의 비둘기 실험 장면을 보면, 비둘기는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머리가 매우 좋다. 도구를 이용할 줄도 알고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도 이해한다. 그러나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헷갈릴 때도 있다. 단추를 누르면 먹이가 나왔던 명백한 인과 관계의 경우와는 달리 일정한 시간마다 먹이를 주도록 설정했는데 그때 마침 자기가 날개를 퍼덕였다면, 날갯짓 때문에 먹이가 나온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비둘기 미신’이라고 부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줄 알지만 우연한 요소가 개입되고 그 파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 가지 길을 선택해서 걷는다. 선택한 모든 길은 옳은 길이다. 그리고 유일한 길이다. 수많은 경로로 들어가서 어떻게 우회해도 항상 한 줄짜리인 불가역적인 길이다. 결과가 생각과 달라질 수도 있고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니 과거에 이렇게 저렇게 했었어야 했다고, 그러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후회하면서 사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니모는 모든 가능한 경로를 다 걸어 봤지만(상상해 봤지만), 결국 안나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떤 길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살다가 어떤 시점 어떤 공간에서 안나와 교차점이 생겨서 둘이 만날 수 있고 서로 사랑하고, 죽을 때 그녀를 기억할 수만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이렇게 안나를 선택하고 우연의 도움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니모는 노바디에서 썸바디가 되어 그만의 유일한 인생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