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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올드>-어김없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by 윤병옥
영화 올드포스터.jpg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진시황제도 죽었다. 모차르트도 죽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죽었다. 고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귀납법을 배울 때 나올 법한 문장인데 누구나 논리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지만 같이 지내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같이 친한 사람이 죽은 경우가 아닌한 ‘메멘토 모리’를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에게 먼 미래에 닥칠 두려운 일을 미리 앞당겨서 일부러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혼을 계획하고 있는 부부가 아이들과 이별 여행을 한다.

멋진 바닷가 휴양지에 도착하자 호텔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하며 개인별로 서로 다른 웰컴 드링크를 건넨다. 아이들은 또래인 매니저의 조카와 친해지고 암호로 글을 주고받는 법도 배운다. 이렇게 세세한 신경을 쓰는 호텔에 감탄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매니저가 다가와 자연보존지구라서 접근이 통제된 사유 해변에 그들을 특별히 초대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부부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날 아침 밴을 타고 그쪽으로 이동한 가족은 다른 초청된 팀들과 같이 동굴을 통과해 사유 해변으로 간다. 모두가 사람도 없고 특이한 절벽이 있는 풍광에 감탄하며 해변에서 노는데 열중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어떤 젊은 여자의 시체가 해변으로 밀려오고, 다른 가족의 일원인 할머니와 개가 죽고, 아이들은 빠르게 성장하는 등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해변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이 나가는 길에서 심한 두통으로 기절하게 되면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고 모두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이 해변에 모두 갇히게 된 것이다.

해변에 놔두었던 시체가 급속도로 부패하는데,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주인공 엄마는 시체의 부패 속도로 보아 이곳의 30분이 밖의 시간 1년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이곳의 하루가 50년인 셈이다. 급속도로 성장한 아이들은 불장난을 하고, 그 결과 임신한 여자애는 30분도 안되어 출산을 하는데 태어난 아기는 먹지도 못한 채 성장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서 죽게 된다.

엄마는 기존의 종양이 빠른 속도로 커지며 악화되어 다른 가족 중에 있던 의사의 도움으로 수술해서 낫게 되지만, 그 의사는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혈우병이 있던 가수를 죽이게 되고 결국 아빠와도 싸우게 된다. 싸움 도중 녹이 슨 쇠막대기에 찔리고 급속도로 녹이 혈관에 퍼지며 그도 죽게 된다. 간질이 있던 여자도 나중에 발작을 하며 죽고, 구루병이 있던 여자도 칼슘 부족으로 뼈가 뒤틀리며 죽는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주인공 가족들 뿐이다. 여행을 오기 전 아빠는 보험계리사로 일하며 매사건을 돈으로 계산하여 분석하고 유리한쪽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메마른 생활을 했고, 엄마는 뱃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어서 불안한 가운데 자신이 근무하는 박물관의 유해들을 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똑같은 신세가 되리라는 우울감에 빠져 바람을 피웠다. 그러나 부부는 이제 늙어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안 들리게 되면서, 서로 기대앉아 화해하며 이 해변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조용히 죽는다.

마지막까지 남은 남매는 밤에 같이 모래성을 쌓다가 호텔 매니저의 조카가 써준 암호문 편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해독해보니 “삼촌은 산호섬을 싫어해”라고 씌어 있었고, 그들은 산호섬으로 헤엄쳐 해변을 탈출한다.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시간이 빨리 흐르는 해변에다 웰컴 드링크에 넣은 신약을 투약한 환자들을 집어넣어 단기간에 효과를 검증하려한 제약회사의 실험에 걸려든 것이었다. 해변에 초대된 각 그룹은 모두 지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포함된 가족들이었다.

탈출한 남매의 폭로로 이들의 행각이 드러나고 중년이 된 남매만 살아남는다.



작가와 감독은 스토리의 개연성을 위해 인간의 대사활동을 촉진시키는 자기장을 내뿜는 거대한 절벽이 있는 독립된 해변이 있다는 조건을 설정했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1년에 이루어질 성장이 이 해변에서는 30분에 일어나는 자연환경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 모인 팀들은 제약 회사에서 신약 실험을 위해 일부러 초청한 사람들이라는 설정이다. 초청 의도가 드러나지 않게 그들의 가족들까지 함께 불렀다. 이것은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주인공이 표적 인물들에게 의도를 숨긴 채 섬에 초대한 상황과 비슷하다.

신약의 효과를 검증하려면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리는데 이 섬에서는 외부시간으로 따지면 하루안에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은 있지만 검증된 약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당연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이것은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를 연상시킨다. 결과적으로 영화내에서는 간질병에 효과가 치료가 있는 신약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검증된다.


하지만 이영화는 이러한 공리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른척하는 시간의 흐름에 녹아있는 인생 문제와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을 바라보라고 만든 영화이다. 긴 시간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 인생을 짧은 시간으로 압축해서 잘 보이게 설정한 것이다. 말 그대로 하루살이 인생을 가정한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뇌과학으로도 밝혀진 일이다. 어릴 때는 뇌에서 처리하는 속도가 빠르고 나이가 들수록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카메라로 비유하자면 어린이의 뇌는 단위 시간당 많은 컷의 사진을 찍어서 슬로우 모션의 영상이, 나이 든 사람의 뇌는 단위 시간당 적은 컷의 사진이어서 순식간에 꽃이 피거나 빵이 구워지는 것 같은 빠른 모션의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후자인 저속 카메라로 인생을 띄엄 띄엄 찍은 빠른 모션의 시간 흐름을 보여준다.

아마도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이런 빠른 속도의 영상으로 회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의 제목이 <모래성>이라는 것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사람들은 인생이 길다고 생각하고 부질없고 사소한 일을 하다가 어이없이 죽는다. 늙으면 사라질 외모에 집착하는 인물도 있고 몸속의 종양 때문에 불안해서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있고 사소한 일로 가족과 다투고 화해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돈 걱정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 쪽지를 쓰는 것처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때 진심을 보인다. 가족과 화해하고 싶어 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소소한 기쁨을 누리다가 서로 옆에서 위로하며 늙어 죽고 싶어 한다. 결과적으로 처음에 죽었던 개와 할머니와 주인공 부부만이 질병이나 사고가 아닌 노화로 죽게 된다.

주어진 시간이 하루건, 100년이건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사소한 일에 연연하며 공허한 삶을 산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누구나 죽는다’는 진부한 말 대신 죽음을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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