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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나이 듦에 대하여

그녀는 영원히 시그리드이고 싶었다

by 윤병옥

과거에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던 주연급 배우가 나이 들면서 조연으로 물러나고 엄마 역할, 할머니 역할을 맡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다.

이 영화도, 유명 작가가 쓴 연극에서 18세에 주연 자리를 따내며 일약 유명해진 배우 마리아가 이제 40세가 되면서 전개된다. 똑같은 연극에서 이번에는 중년의 배역을 제의 받는다. 그녀가 그것을 수락하면서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명 배우 마리아는 비서 발렌틴과 함께 자신을 발굴해서 키워준 작가 발렘의 대리 수상을 위해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간다. 그가 극본을 쓴, 두 여성의 관계를 다룬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젊은 여자인 시그리드역을 맡은 뒤 그녀는 유명해지고 승승장구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은인인 셈이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그가 죽었다는 기사가 나고, 그의 부인에게서 그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시상식에서 추도사를 끝냈을 때, 피로연에서 클라우스라는 젊은 감독이 그녀를 찾아와 다시 그 연극을 기획한다며 그녀에게 이번에는 중년 여자 헬레나역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은 여전히 자유롭고 파괴적인 시그리드라며, 나이든 여자 배역을 부담스러워한다.

감독은, 작가 발렘이 죽기 전까지 40살이 된 시그리드의 이야기를 쓰는 중이었다며, 자신은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시그리드를 연기했던 그녀만이 제대로 헬레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그녀를 설득한다. 결국 그 배역을 수락한 마리아는 머리를 짧은 스타일로 자르고 준비한다.

마리아는 감독의 집에 가서 그의 부인과 함께 그가 자살한 말로야 계곡이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 연극의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란 고개 너머에서 발생한 구름이 엄청나게 쌓여서 골짜기 사이를 뱀처럼 경이롭게 움직이며 빠져나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봉우리를 구름이 휘감는 것이 전조현상이다.

항상 함께 다니며 일을 돕고 극본 연습도 같이 하는 비서 발렌틴이, 시그리드 역을 맡은 할리우드 배우 조앤에 대해 성격이 쿨하고 솔직하며 크게 될 배우라고 칭찬하자, 마리아가 자신은 지루하냐며 질투심을 보인다. 발렌틴이 시그리드 파트를 맡아 같이 대사를 연습하다가, 대본에서 시그리드가 헬레나를 무능한 경영자 취급을 하는 부분에 이르자, 마리아가 짜증을 내며 극본이 중년 여성의 패배의식과 불안감을 조장한다며 눈물까지 보인다. 시그리드의 젊음, 매력, 침착함, 자신감만 강조하는, 시그리드만 빛나게 쓴 거지 같은 각본이라고 욕한다.

그러나 발렌틴은 시그리드는 오만한 반면, 헬레나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사람이라며 헬레나를 두둔하고, 감독이 그 연극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기회를 마리아를 20년 기다려서 잡은 거라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마리아는 헬레나가 싫다며 자신은 시그리드로 남고 싶다고 한다. 의견 충돌 후 발렌틴이 남자 친구를 만나러 나가자 마리아가 질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나중에 둘은 극장에 가서 조앤이 출연하는 우주인 영화를 관람하는데 마리아는 혹평을 하는 반면, 발렌틴은 영화 배경이 우주선일 뿐 사랑을 선택하는 연기를 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자신은 조앤의 연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둘이 산에 올라가며 대본 연습을 하는데 마리아가 시그리드가 떠나는 장면에서 하는 대사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자, 발렌틴은 시그리드는 헬레나의 욕망을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라고 반격한다. 해가 지기 전 하산하면서, 발렌틴은 마리아가 연극과 배역에 관한 불만과 화를 자신에게 발산하고, 작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으니 비서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그녀가 필요하다며 만류한다.


조앤이 마리아를 만나기를 원해서 남자 친구인 작가 크리스와 함께 와서, 자신이 15살에 처음 그녀의 영화를 보고 그녀를 롤모델로 삼고 노력해 왔다며 그녀의 시그리드역을 누가 능가하겠냐며 띄워주자, 마리아의 조앤에 대한 마음도 누그러진다.

다음날 새벽이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는 기상 조건이라는 말을 듣고 둘은 계곡으로 향한다. 날씨가 춥고 언덕이 빨리 나오지 않자 마리아가 화를 내고, 각본의 마지막에서 헬레나가 산행 후 돌아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마리아는 자살했다고 단정 짓고, 발렌틴은 다른 곳에 가서 새 삶을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발렌틴은 마리아가 시그리드에게서 야심과 폭력성을 보는 것은 그녀 안에도 그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받아친다. 멀리 말로야 계곡이 보이자 어느새 뒤따르던 마리아가 앞장을 선다. 말로만 듣던 봉우리를 감싸는 구름이 형성되고 구름이 계곡으로 몰려오기 시작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감탄하며 옆을 보니 발렌틴이 없다. 마리아가그들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며 이름을 부르면서 발렌틴을 찾지만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몇 주 후 런던의 공연 일정이 잡히고 ‘헬레나가 된 시그리드’라는 홍보 문구가 대서 특필된다.

조앤의 남자 친구의 부인이 자살 기도를 해서 위독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조앤은 개의치 않고, 마리아에게는 새로운 사무적인 비서가 왔다.

리허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그리드가 헬레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떠나는데, 마리아는 조앤에게 헬레나가 잊혀지지 않게 잠시 머물렀다 떠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조앤은 그 시점에 이미 볼장 다 본 나이 든 불쌍한 여자에게 누가 신경 쓰겠냐며 시그리드의 앞에 펼쳐질 미래만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냉정하게 거절한다.

연극이 시작하기 직전, 대기실에 25살의 젊은 감독이 찾아와서 마리아를 염두에 두고 영화의 대본을 썼다며 주인공인 돌연변이 생물 역할을 제의한다. 마리아가 조앤이 자신보다 그 역할에 더 적합하지 않겠냐고 하자, 그는 자신의 영화 주인공은 나이가 없고 시간대를 초월하는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곧이어 연극이 시작된다.



마리아가 18살에 시그리드 역할을 했을 때 그녀는 아름다웠고 자신감이 흘러넘쳤었다. 같이 공연했던 헬레나 역할의 선배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만했었다. 그 선배 배우는 얼마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 시그리드역의 조앤도 처음 만났을 때는 마리아를 추켜세우는 척했으나, 리허설에서 보면 마리아를 완전히 무시한다. 똑같은 관계의 반복이다.

영화 속의 마리아도, 실제 배우 줄리에트 비노쉬도 이제 중년의 배우이다. 아름다움과 자신감으로 승부하는 나이가 아니다. 젊은 시절 화려했던 배역 대신 이제는 나이 든 배역이 들어오고, 유명 화장품 광고 대신 쇼핑몰 광고 화보 사진 의뢰가 들어오는 위치가 되었다.

감독의 말처럼 둘은 다른 인물이 아니라 시그리드가 나이 들어 헬레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플롯은 겹겹이 쌓여있다.

영화 속 연극의 시그리드와 헬레나, 영화 속 현실의 조앤과 마리아, 젊은 날의 마리아와 중년의 마리아, 비서 발렌틴과 마리아, 심지어 실제 현실 속 젊은 날의 줄리에트 비노쉬와 중년의 그녀까지 중첩된다.

감독은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영리하게 과거 시그리드였던 마리아를 헬레나역에 캐스팅하고 매스컴에도 ‘헬레나가 된 시그리드’라고 홍보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시그리드 역이었을 때는 신경 쓰지 않던 헬레나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은 영원히 시그리드이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심리 상태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다.

나이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적 자기의 메시지는 비서 발렌틴의 목소리로 대변된다. 그녀는 조앤이 가진 젊음의 매력을 인정하면서도 나이든 중년의 마리아가 철없는 젊은 시절보다 인간적이고 멋있다고 말해 주지만, 마리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어느 날 마리아와 싸우고 연극속 시그리드처럼 홀연히 떠나지만, 심리적으로 그녀의 영향은 여전하다. 오히려 발렌틴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들어와 영원히 자리잡은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온 젊은 감독은 마리아의 분위기가 시대와 나이를 초월하는 캐릭터라고 말해주는데, 그녀는 그 배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고, 감독의 표현은 평소 발렌틴이 그녀에게 해준 이야기와 사실상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자신이 가장 화려했던 젊은 날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젊음은 어느날 갑자기 떠나기 마련이며,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마음에 존재한다.

또한 젊은 날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생긴 주름과 눈빛은 젊은 사람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마리아는 20년 만에 다시 하는 연극을 준비하며,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영원하고 깊은 눈빛을 내뿜으며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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