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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애프터썬>-진실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뒤늦게 보이는 아빠의 마음

by 윤병옥

당연한 말이지만, 부모는 언제나 자식보다 나이가 많다.

부모는 자식의 세상이고 우주이다. 부모는 전능하고 자식에게 무조건의 사랑을 주고 보호해야 한다.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딸은 부모를 이해할 수도 없고 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과거 특정 시점의 부모와 나이가 같아지는 순간이 오고, 그 후부터는 내가 부모보다 나이가 많아진다. 그러면서 어릴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을 맞는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와 이혼한 31살의 아빠와 11살의 소피는, 여름방학에 함께 튀르키예로 여행을 간다.

도착한 호텔은 이야기 들은 것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공사 중이고, 2개의 침대가 있는 방이 아닌 원베드룸만 남아있지만, 아빠는 소피에게 큰 침대를 주고 자신이 작은 보조 침대를 가져와서 쓴다.

호텔에 딸린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썬베드에서 일광욕도 하며 지내는데, 아빠는 일정 시간마다 소피의 등에 정성껏 애프터썬(썬크림)을 발라준다. 호텔의 오락실 당구장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그들을 남매인 줄 알지만 아빠는 소피가 딸이라고 밝힌다.

방에서 아빠는 베란다에서 이상한 동작으로 태극권을 하고 명상에 관한 책을 읽고, 소피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신술을 가르치며 잡힌 손목을 비틀어서 빼보라고 계속 연습시킨다.

사우나를 함께 하면서 소피는 아빠와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아빠와 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요트를 탔을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잠수복을 입으며 스킨 스쿠버를 하는데, 아빠는 자격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물속에 들어가서는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

다음날 소피가 침대에서 자신이 우울한 것 같다며 모든 것에 지치고 가라앉는 기분이라고 이야기하자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쇼핑을 다니다가 카펫 가게에 온 아빠는 카펫의 무늬에 매혹당하며 카펫 문양의 상징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며 눈을 떼지 못한다.


둘은 부지런히 여행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비디오 촬영을 하는데 방에서 소피가 아빠를 찍으며 그가 11살 때는 31살에 무엇이 될 거라고 예상했냐고 질문하자, 아빠가 정색하고 카메라를 끄고 만다. 소피가 카메라가 아닌 내 마음에 녹화하겠다며 다시 11살 생일에 뭐 했냐고 질문하자, 아무도 몰라줘서 자신이 생일임을 직접 밝히고 아빠에게 장난감 전화를 사달라고 했다고 대답한다. 왜 엄마와 자신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냐는 질문에 그곳에 더 이상 소속감이 없고 거기는 자신에게 과거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딸인 소피에게는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어 살라고 한다.


저녁에 투숙객을 위한 장기자랑이 있을 때 소피가 같이 노래하자고 하지만 아빠가 거절하고 방으로 돌아가자 실망한 소피는 혼자 남아 사람들과 어울린다. 한참 놀다가 돌아갔지만 방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로비 소파에서 누워있었는데 매니저가 문을 열어주어 들어갔을 때 아빠는 옷을 벗고 물에 젖어 침대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는 “소피, 사랑해. 그것을 절대 잊지 마. 아빠가”라고 쓴 엽서가 있다.

다음날 아침, 버스로 관광지 투어를 갈 때 아빠는 소피에게 어제 일을 사과한다. 그러면서 살면서 남자, 파티, 마약 등 어떤 일이 있어도 아빠는 다 이해하니, 자신에게 솔직히 다 말해달라고 한다.

이날은 아빠의 31번째 생일이었고 폐허가 된 스타디움에서 소피의 계획으로 관광객 모두가 아빠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데 햇빛을 등지고 그것을 듣는 아빠의 얼굴은 너무나 복잡하다.


떠나기 전날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할 때 폴라로이드 사진사가 와서 사진을 찍어준다. 천천히 사진에서 둘의 모습과 색이 드러난다. 소피는 이번 여행이 지금껏 살면서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고 하고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빠는 딸을 안고 밴드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공항에서 소피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날, 아빠는 소피가 승강장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비디오카메라로 찍는다.



이 영화의 플롯은 소피가 아기의 엄마가 되고, 여행할 때의 아빠와 똑같이 31살의 생일을 맞은 아침에, 소피가 아빠와의 여행 비디오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비디오 장면은 일반인이 촬영을 했기 때문에 화면이 흔들리고, 구도도 엉망이고, 둘이 서로를 찍었기 때문에 대부분 한 사람이 흔들리며 나오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둘이 안정적으로 나오는 나머지 장면들은 다 소피의 기억들이다.(소피의 표현으로는 마음에 녹화한 부분들이다.) 비디오 부분은 팩트여서 객관적이지만, 나머지는 기억 부분이라 주관적이다.


31번째 생일이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아빠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로 아빠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고, 여행 후 오래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내가 나이가 많아져도 부모도 같이 나이를 먹기 때문에 늘 격차가 있기 마련인데, 부모가 세상을 일찍 떠나면 내가 그 나이보다 많아지는 순간을 맞게 된다.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이 인화되려면 시간이 걸리듯, 소피도 어렸을 때는 어렴풋이 보이던 것들이 아빠의 나이가 되어서야 이해가 된다. 어린 소피는 그때는 어려서 확실히는 몰랐지만, 아빠가 슬퍼 보이고 걱정되었었다. 바다속에서 잠수한 아빠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을 때도 뭔가 불안했고, 아빠와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에 있기만 하면 된다는 위로도 아빠가 계속 살아있어 달라는 무의식적인 외침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먼저 방으로 들어간 날 혼자 놀다가 나중에 들어갔을 때 아빠가 옷을 벗고 물에 젖어있었던 것도, 그때는 몰랐으나 아빠가 너무 괴로워서 죽으려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서 빠졌다가 딸을 생각하고 간신히 다시 나와서 침대에서 울다가 소피를 사랑한다는 노트를 쓰고 잠들었을 거라고, 소피는 31살이 되어서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빠가 왜 어린 자신에게 호신술을 가르쳤으며, 시간에 맞춰 등에 애프터썬 크림을 발라주었는지도,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도 딸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해석할 수 있다.


그동안 소피는 자기를 두고 세상을 떠나서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도 없게 된 아빠를 원망하며 여행 비디오를 처박아 두고 외면했을 것이다. 이제 아빠의 마지막 나이인 31살이 되고 자신도 부모가 되니, 마음속에 다시 아빠를 소환하고 그를 이해하고 싶어진 것이다.

아빠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지만, 31살이면 지금의 소피처럼 어리고 많은 것이 불확실한 나이이다. 어릴 때 소피를 얻고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아빠의 얼굴을, 같은 나이가 된 딸이 대등하게 바라보고 용서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말한다. 나도 아빠를 사랑한다고.

비디오 촬영은 소피가 승강장으로 들어가며 끝났지만, 이제 소피는 아빠가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를 닫고 쓸쓸하게 돌아서서 복도 끝의 문을 열고 혼돈의 세계로 들어가는, 카메라 뒤의 장면까지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비록 마음의 고통이 그를 데려갔지만,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느끼는 소피가 눈물을 삼키며 비디오 화면을 끈다.

*이 영화는 감독이 일찍 떠난 아빠를 생각하며 만든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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