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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패터슨>-당신도 예술가다

일상에서 의미 건져 올리기

by 윤병옥


패터슨은 자신의 이름과 동명의 도시, 패터슨시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기사이다.

그의 일상은 매일 6시 정도에 일어나서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출근해서 버스를 운전하고 점심 시간에 직장 근처의 폭포가 있는 곳에 가서 아내 로라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다시 일하다가 퇴근해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 마빈을 산책 시키고 동네의 바에 가서 맥주를 한잔하고 돌아와 자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어떤날을 임의로 꺼내서 들여다 보아도 똑같은 일상일 것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그가 그러한 생활 틈틈이 비밀 노트에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성냥에서도 아내와의 사랑을 연상하고, 저녁마다 들르는 바에서도 다른 차원을 상상하며, 아내가 만들어준 저녁 메뉴를 보고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운전하는 버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감정 이입을 하여 시를 쓴다.

그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인데 그의 아내는 주부이지만 집안의 소품이나 가구에 자신의 색과 스타일을 입히는 예술가이고, 동네 세탁실에서 마주치는 청년은 훌륭한 래퍼이며, 매일 저녁 바에서 만나는 실연한 남자도 배우이고, 점심시간에 길에서 마주친 소녀도 비를 여자의 긴 머리칼과 비유하는 자작시를 들려주는 시인이다.

또한 똑같은 일상인 것 같지만 끊임 없이 소소한 변주가 일어난다. 아내가 밤에 꾸는 꿈은 매일 다르며, 버스를 타는 인물들은 매일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대화를 한다. 아내는 런치 박스 안에 사진을 넣어주는데 매일 다른 것으로 바꾼다. 버스는 매일 잘 달릴 것 같지만 어느 날 고장나기도 한다. 저녁마다 가는 바에서, 실연한 배우는 어느 날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큰 변수는 그의 애완견이다. 그와 로라의 사이를 질투하는 듯한 애완견 마빈은 차분한 패터슨을 뒤집어놓는 역할을 한다. 그는 매일 저녁 하는 산책에서 패터슨의 리드를 거부해서 제멋대로 방향과 속도를 결정할 뿐 아니라 집 앞에 세워진 우편함을 번번이 밀어서 비뚤게 만들고 급기야는 패터슨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시를 써놓은 노트를 씹어서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허탈해진 패터슨이 평소에 자주 가던 폭포 앞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어떤 일본인 시인이 다가와서 당신도 시인이냐고 묻자, 패터슨은 자신은 버스 기사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아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도 평생 시를 썼던 패터슨시에 살았던 위대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는 자신에게 시는 호흡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빈 노트를 선물하며 떠나고 패터슨은 거기에 새로운 시를 쓴다.



사람들은 일상에 지쳐서 할 수없이 비루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합리화 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 패터슨의 시 작업을 통해 주로 주제를 이야기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찾으며 격조 있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패터슨의 아내는 전업 주부로 살림을 하면서도 가구와 옷과 커텐등에 개성있는 색채를 입혀 예술성을 표현하고, 세탁실에서 마주친 동네 청년은 랩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바에서 매일 만나는 남자는 연기를 통해 일상을 극복한다.

일상과 예술, 또는 의미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계속 보여주는 쌍둥이 이미지가 그것을 알려준다. 길에서 마주친 쌍둥이 소녀는 학생이지만 멋진 시를 쓴다. 그녀는 학교에서 일상을 보내지만 한편에서는 시를 쓰는 것이다.(또는 쌍둥이중 한명은 평범한 학생이지만 다른 한명은 시인이다.) 또 패터슨은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 여성에게 아내의 이미지를 본다. 그러자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내로 바뀌는 경험을 한다. 그는 영화 화면과 아내를 번갈아 본다. 그들은 쌍둥이인 것이다.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다 이와 같이 일상과 예술이 다르지 않다는 은유이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하는 패터슨의 안정감을 해치는 본능의 방해도 있다. 애완견의 심술은 심리학적으로는 ‘이드’나 ‘그림자’의 방해라고 볼 수 있다. 패터슨의 꾸준한 노력을 비웃는 개는 우편함(패터슨의 자아)의 균형을 넘어뜨리고, 주인의 산책 경로와 속도를 좌지우지하고, 급기야는 그의 핵심 가치라고 볼 수 있는 시작 노트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일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패터슨 무의식 한구석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그의 아내는 심리학적으로 ‘아니마’라 볼 수 있는데 그의 시 쓰는 작업을 격려하고 그의 시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녀는 남편이 시를 쓰기 위해 지하실(무의식)에 내려가거나 저녁마다 바(다른 차원의 무의식)에 가는 것을 격려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비밀 노트속의 시를 다른 곳에도 복사해 놓으라고 계속 충고했었는데 그전에 노트가 파괴되어서 안타까워하며 남편을 위로한다. 이때 패터슨은 자신의 시가 물에 떠내려가는 단어들일 뿐이라고 애써 차분하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허탈한 마음을 누를 수 없다.


허무해진 그가 폭포가 있는 장소로 갔을 때 갑자기 나타난 일본인 시인의 말은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이다. 영화속의 표현으로 하면 일본인 시인은 그와 쌍둥이이고,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의 ‘자기(self)’이다.

그는 '시는 자신에게 호흡과도 같은,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죽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는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흘러가는 일상에서 의미를 건져 올려 그만의 천을 짜는 행위이다. 세상과 떨어져서 골방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시인 것이다. 그가 빈 노트를 패터슨에게 선물하고 간 후, 패터슨은 벤치에 혼자 앉아 폭포를 바라보며 그 노트에 새로운 시를 쓴다.

물밖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물고기가 되라.”는.

패터슨은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이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시만 쓰는 사람이거나 세상일에서 떨어져서 대상을 관찰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패터슨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영화는 일상과 시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루한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의 강에는 많은 의미(단어)들이 떠내려가지만 그것을 건져서 배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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