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90세가 넘으면서 그전에 영위하시던 형태의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전보다 더 자주 드나들며 두 분을 살펴드려야 했다. 전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가서 즐겁게 해 드리는 차원이었다가 이제 내가 없으면 부모님 생활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독립적인 분이라 예전에는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셨는데, 이제는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셨다. 나이 들어 약해지신 부모님이 불안해하지 않게 편안히 생활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해서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식품과 생필품과 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힘들었던 것은 엄마가 연세가 드시면서 고집도 세지고 주변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신 것이다. 젊을 때 아버지에게 큰소리 한번 안 내던 엄마는 아버지에게 당신 마음을 몰라주신다며 매일 잔소리하며 불평하셨다. 어떤 때는 아버지의 청력이 나빠져서 잘 안 들리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가면 먹기 싫다며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가, 안 가져가면 먹을 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안 해왔다며 비난하셨다. 또 내가 부모님 집에 가서 엄마 옆에 같이 있는 짧은 시간 동안만 당신을 위해서 쓴다고 생각하며 무심하다고 화를 내셨다. 우리 집이 멀어서 왔다 갔다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고 부모님 드실 음식 만드느라 보낸 시간, 음식 사다가 드리느라 식당에 간 시간, 식료품 사느라 슈퍼에 간 시간도 생각하지 않으셨다. 필요한 물품 생각하고 검색하고 인터넷 쇼핑으로 보내드리느라 든 시간과 비용도 안중에 없었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약 받고, 재가 요양을 위해 의사 의견서를 받으러 가고 등급 심사 신청하느라 동분서주하는 것은 엄마에게 보이지도 않으니 없는 일이었다. 그저 더 자주 와서, 오래 있다 가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셨다. 심지어는 너만 잘살면 그만이냐고 원망하시며 죄책감을 자극하셨다.
부모님이 아직 움직이시는 게 가능할 때는 주로 점심때 외식을 했었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메밀 막국수집과 떡갈비집이 단골 식당이었다. 나에게는 혼자 운전하며 연로하신 두 분이 차에 타고 내릴 때 부축하는 것도 힘에 겨웠고 빈번한 외식이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해드리는 일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했었는데, 엄마는 이런 비용은 보이지 않는 비용이어서, 그저 직접 드리는 용돈만 내가 경제적으로 부담하는 전부라고 생각하셔서 부족하다고 여기셨다.
주변에 엄마가 아시는 분들에게는 효자 효녀가 넘쳤다. 엄친아 엄친딸들이 자주 꽃구경, 단풍 구경시켜 드리고, 다니시는 절에 자주 모시고 온다고 하셨다. 내가 하는 노력은 엄마의 성에 차지도 않았던 것이다. 내가 24시간 엄마만을 위해서 같이 살지 않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맞다. 나중에는 이런 엄마 보살피는 일이 너무 지치고 힘들었었다.
젊었을 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던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안 계시는 것이었다.
말년에 좋은 요양사님이 오시게 되어 함께 도와가며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니 한결 수월해지기는 했다. 무엇보다 엄마의 잔소리에 우울해하시던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까 마음이 밝아지셨다. 나도 내가 없는 시간에 끼니도 챙겨드리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가 이제는 당신만 생각하고 너무 이기적으로 변하셨다고 생각되어 원망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양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과거의 엄마를 소환했다.
나는 어릴 때 음악을 좋아했고,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 피아노였다. 그러나 먹고살고 교육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가정 형편이었던 우리 집에 피아노는 사치였다. 초등학교 때 이웃의 어떤 집에서 피아노를 처분한다고 해서 중고 피아노가 나왔는데 나는 엄마가 그것을 사주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고심 끝에 사주지 않았고, 미안해서였는지 피아노 학원을 몇 달 보내주셨다. 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배웠지만 연습할 피아노가 집에 없으니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만두었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닐 때 월급을 모아서 제일 먼저 산 것이 피아노였다. 다시 레슨을 받으며 퇴근 후 매일 피아노를 두드렸다. 그리고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자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아이들과 동요를 듀엣으로 연주하기도 하고 집에서는 늘 피아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들들은 지금도 피아노를 꽤 잘 친다. 그 정도로 나에게 피아노란 이루어지지 않았던 어릴 적 소망의 상징이다.
그런데 요양사님을 통해 엄마가 나 보다도 더 과거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나는 부모님 댁에 가서 요양사님이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무안함을 무릅쓰고 아버지가 좋아하신다는 노래를 불러드리며 재롱을 떨었다. 부모님도 즐거워하시고 요양사님도 따님이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해주셔서 기쁘게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음악을 잘하던 딸에게 어릴 때 피아노를 사주었어야 했다고,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못 해주어서 너무 미안하다'라고 울면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손자가 피아노를 잘 치지만 딸도 어릴 때 잘 쳤다고 하셨단다. 또 당신이 손자들을 봐주지 못해서 딸이 직장을 그만두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셨단다.
엄마가 빠듯한 살림에 자식들을 모두 최고 교육까지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하던 어린 시절의 구멍이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구멍에 모양이 있다면 피아노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말을 전해 듣던 날, 어릴 적 못 사주신 엄마의 피아노가 가슴에 들어왔다. 내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산 피아노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던 공백이 메워졌다.
아들들에게는 관대하면서 딸에게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와, 아이들이 어릴 때 돌봐주지 않으셔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서운함까지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그 일을 잊지도 않았고, 피아노 모양의 돌덩이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나를 아무리 힘들게 해도, 엄마의 깊은 마음속 진심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