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아꼈던 조카가 쌍둥이 아기들을 낳았다. 아기들이 순하고 잘 웃고 예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고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이다.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는 아기들을 특별히 예뻐하지 않았지만 내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는 나도 아이들을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키웠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매우 힘든데도 사람들이 기꺼이 그 일을 하는 걸 보면 유전자의 힘이 대단한 것 같다. 힘든 것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아기들은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보여주고 부모가 쏟아부은 에너지가 아깝지 않게 나날이 성장하고 혼자 살아갈 능력을 갖추어간다. 최소한 나의 희생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옛말대로 ‘내리사랑’이다.
한편 내가 어른이 되고 중년이 된다는 것은 부모가 늙는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지지로 성장한 내가, 부모를 도와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 은혜 갚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부모는 예쁘게 웃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능력도 떨어져서 더 의존하고, 게다가 고집도 세서 남의 말도 안 듣는다. 더 요구하면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부모를 도와드리는 일은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고 의무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 된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는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냐고 질문한다.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라고 말하면 위선자 같이 느껴진다. “아니다”라고 말하면 죄책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나이 든 부모들도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처럼 열렬히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나이 든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폈는데,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아버지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세끼 식사를 챙겨 드리고 집안일을 해드리고 그 집에서 책 읽고 글도 쓰는 등 자기의 일도 하였다. 실제로 아버지와 다정한 대화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그가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에 아버지는 낮잠을 잘 때가 많았다. 잠만 자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실망하며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이 늘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불안해하지 않고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거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조언은, 유난스럽게 부모에게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필요할 때 자식들이 언제라도 도와줄 거라는 것을 부모가 느끼고 불안해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융 심리학자이자 신부이기도 한 오이겐 드레버만은 나이 들어서 신체도 기억도 불완전하고 고집까지 부리는 부모를 ‘한때는 너무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허물어져 흔적만 남은 폐허’라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건물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식들 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이 든 부모가 때로 비합리적이거나 힘든 요구를 할 때 휘둘리지 말고 ‘부모가 만일 과거의 맑은 상태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생각해서 거절하거나 현재의 요구와 그것을 절충해서 결정하라는 것이다.
부모의 무리한 요구가 힘들 때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릴 때가 많은데, 물론 셋째 딸 코딜리어에 감정이입을 한다. 성인이 된 자식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새로운 가족에게 사랑과 에너지를 나누어야 하므로 부모에게 어릴 적 보여주었던 헌신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리어왕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그의 저서 ‘성찰하는 삶’에서 다른 깨우침을 준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코딜리어는 냉정하게 남편에게 나누고 남은 만큼밖에 없다고 대답하여 리어왕을 실망시킨다. 그 결과 리어왕에게 쫓겨난 코딜리어는 프랑스 왕과 결혼해서 살지만, 두 언니에게 버림받고 황야에서 방황하는 아버지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달려온다. 리어왕은 이기적이고 고집 세고 비이성적인 존재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노인의 전형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약점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딸이 온다. 아버지의 부모 노릇을 하기 위해 달려온다. 마침내 리어왕은 구원받는다.
노직은 최고의 성숙 단계는 자식이 부모의 부모가 되는 단계라고 한다. 이제는 나도 그것이 무슨말인지를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