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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n 27. 2020

아랫니 세 개

   연두색 형광조끼가 선명했다. 나의 눈도 형광색을 따라 걸었다. 지면과 맞닿을 정도로 구부정하였다. 걸음새가 횡단보도 건너자면 한 나절 걸릴 것 같았다. 신호등 불빛이 꺼질 즈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노인이었다.


  소일거리가 있는 옥상으로 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올라가 보는 곳이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상추와 들깨 씨를 뿌렸다. 잦은 비는 식물의 자람을 격려하여 하루가 달랐다. 이틀 전 올라가서 수선을 피울 땐 이상이 없었다. 25센티 정도 자란 1년생 제피나무가 잎은 몇 장 없고 굉장히 초라해 보였다. 잎 크기는 일 센티도 되지 않는다. 화단에 노랑나비가 날아다니고, 호랑나비가 보이더니 아뿔싸⁠…


 미물이 식물을 의지하여 번식할 시기이다. 탱자나무가 화단에 우연찮게 한 포기 자라고 있었다. 나비들은 탱자나무 이파리에 알을 낳는 것을 어릴 적에 본 기억이 있다. 나는 가끔 터전을 마련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고 여러 마리가 공존할 크기와 넉넉한 품은 아니다. 겨우 땅에서 맴돌고 있는 정도지만, 내가 볼 땐 무릉도원 같았다. 그런 곳은 제쳐두고 손으로 헤아려도 될 만큼 몇 안 되는 이파리에 알을 낳고 떠난 어미가 한심했다. 그래서 미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둘러보니 거의 다 먹어치우고 두세 장 어름 한 잎만 남았다. 미물들이 줄기 사이사이로 보였다. 알에서 부화하여 불과 4~5일 안에 벌어졌고, 무려 8마리가 꼬물대고 있었다. 나무와 나비 유충 모두 이생을 하직할 상황이라 나비 누에를 희생시켜야만 했다. 잎이 부족하여 한 마리도 살아남을 확률이 없었다.

 

  나비 누에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제피나무는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시절에 부족한 이웃을 만나 곤욕을 치르며 이승을 등질 딱한 신세였다. 노인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분이다. 작년 어느 추운 겨울날 내 가슴에 파고들어 온 나비 누에였다. 나의 나무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내가 제피나무 잎이 되어버렸다. 


  주문만 받는 학생은 고객이 남기는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다 부었다. 사장이 가르친 대로 마구 쏟아버렸다. 사장은 삼 개월 전부터 접수받는 학생을 더 이상 채용하지 않았다. 내가 김밥이나 주먹밥 재료가 마감시간 임박하여 두어 수저 정도로 남으면, 김밥을 싸서 폐지 줍는 노인에게 주자고 사장한테 건의를 했다. 남는 음식은 모름지기 신선할 때 나누어야 옳은 인심을 쓰는 것이다. 사장은 움켜쥐고, 나가는 것이 없어야 재산증식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건의가 무산되었다. 칼바람 불어대는 상가 앞 인도, 내던져 놓은 폐지를 치우고 말끔하게 청소도 해주는 노인 도울 방법을 궁리했다. 꼬마김밥 8개가 저녁식사로 나의 몫이다. 나는 5개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껴 세 개는 노인과 나누기로 마음을 정했다.


 밤 아홉 시, 왜소한 노인이 수북이 쌓인 폐지 사이에 폭 파묻혀 있었다. “영감님, 김밥이 남아 드리고 싶은데 잡수시겠어요? 기분 나쁘면 안 받으셔도 돼요” “주면 고맙지요” 아랫니 세 개뿐이었다. 노인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개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두 볼이 홀쭉했다. 해맑은 동안이었다. ‘영감님‘이란 호칭이 적합하지 않다 느껴졌다. 내가 음식 뒤 처리를 맡으면서 노인과의 인연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이었다. 옷은 겹겹이 껴입었고, 가슴이 리어카 손잡이와 가까운 친구처럼 보였다. 노인의 등이 구부정한 만큼  앞으로 가슴을 내몰면서 세월과 함께 무겁게 끌어갔다.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깊은 밤에도 끊임없이 오갔다. 

  

  훈풍이 일하는 가게 앞에서도 서성댔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면, 펑퍼짐한 아주머니가 가로수 밑 간이의자에 종종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노인의 연세를 물었다. 자그마치 팔십 오세, 아내는 팔십 칠세라며 너스레 전을 펼쳤다. 확실한 ‘영감님’이었으며, 나를 더 낮추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루는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퍼뜩 ‘사장이 배려해주어 남은 음식을 드릴 수 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라’고 할 지혜로운 말이 떠올랐다. 사장은 인사를 받으면서 베푸는 의미를 알면 좋은 일이고. 영감님은 사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 어른이 횡단보도를 달팽이가 움직이듯 지나가고 계셨다. 이미 노인의 슬하를 떠난 자식들도 아이가 있을 것이다. 


  나비가 잎이 무성한 탱자나무에도 알을 낳고 떠났다. 나비는 어디를 날고 있을까. 부화한 나비 누에가 고치를 틀 때면, 도움을 준 탱자나무는 무사할까. 옥상 제피나무에 알을 낳고 싶어 낳았겠지 인간처럼 앞뒤 재고 그랬을 리 만무하다. 하긴 사람도 달세 방으로 전전하며 입에 풀칠이 어려운 삶도 있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미가 한 번 더 살펴보고 알을 낳았어야지⁠… 어미의 지혜로운 생활은 자식이 보고 배우지 않던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애벌레의 궁핍한 하루로 이어지고,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인연의 결과로 윤회를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며칠 뒤, 아침 댓바람에 옥상으로 가서 제피나무를 확인했다. 때가 때인지라 나무 가지를 자르고, 또 잘라내도 잎을 내밀어 키우는 계절이라 새파란 기운이 완연했다. 60 중반인 나, 고령임에도 시간제 일을 시작하여 고단한 노년의 삶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현재 나의 상황은 어린 제피나무같이 불안정하다. 그렇지만 나는 바른 견해로 좋은 생각을 하면서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실천 중이다. 부족한 금생은 전생의 삶이 원인이라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제피나무 같은 현세지만, 잎이 풍성한 나무 되어 수십 마리 나비가 의지할 수 있는 내생(來生) 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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