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고 진솔한 아버님의 이야기는 버릴 게 없었다. 신작 에세이에서나 읽을 수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귤껍질 벗겨 내듯이 정감 나게 말해 주신다.
저녁밥을 먹으며 나누었던 아버님의 일상은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인간극장의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다를 게 없는 평이한 삶을 살아가는 백수농부의 일상은 농사일을 접고서도 늘 바쁘고 활기차 보였다.
"아버님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공부 하느라 바쁘지"
"공부요!"
"응 지하철 노선 들여다 보고 버스 노선 들여다 보고 어디서 내리고 어떻게 집에 와야 되는지 한참을 들여다봐야 돼 "
"어디 그것뿐인가"
"요즘 식당 어디를 다녀도 종업원 있는 데가 있어야지 "
"현금 주고 주문할 줄만 아는 노인네가 알아야 밥을 시키지"
"그래서 남들 주문하는 걸 지켜봤지 "
"식탁에 붙어 있는 노트북에 쿡쿡 눌러서 하는데도 있고 식당 입구에 현금출납기처럼 생긴 거에 눌러서 하는 것들도 있더라고 "
"우리 같은 늙은이 에겐 그게 여간 힘든 게 아니야"
"그래도 어떡하나 " "어깨너머로 배웠지"
"지난주는 서울대공원에 다녀왔어"
"심심하기도 하고 날도 좋아서
자네 장모랑 같이 다녀왔어"
"지하철 사호선 타고 내리면 되는 거니까
힘들지는 않았는데"
"내리고 나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힘이 들지 모야 "
"그래도 걷자고 온 거니까 그늘로 찾아다니며 걸어서 올라갔어 "
"코끼리열차 타려고도 했는데
이천 원이 아깝더라고 "
"그날 집에 올 때도 전철을 타고 안양역에 내려 버스를 탔지"
"집에 들어오니 어찌나 좋은지 몰라
그날 푹 잠들었지 "
"우리가 안 다녀 본 데가 남산하고 경복궁이 있더라고, 거길 다녀와야겠다 마음먹고 난 후 지하철 공부 중이야 어디서 내려야 되는지
또 어디서 밥을 먹어야 되는지 인터넷으로 맛집도 찾아보고 아주 재밌어"
"경마장도 다녀왔는데 다른 백수들처럼 마냥 있지는 못하겠더라고 말 달리는 거 보고 왔네"
토마토 농사를 지으셨던 장인어른은 사 년 전 농사일을 그만두셨다. 하우스 농지가 신도시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리셨다.
농장 주위로 하얀 팬스가 쳐지고 하우스 철거가 되던 날 어머님은 하우스 농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자식 같이 아끼고 돌보던 땅이 사라지는 걸 보는 심정이 어떠했을지 헤아려 본다. 아버님은 농사일을 놓으신 후 집안에만 있는 시간이 심심 해질 때면 차를 몰고 여기저기 김삿갓처럼 돌아다니셨다.
사람 많은 공원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기도 하고, 햇살 좋은 날에 의자에 앉아 볕을 쬐기도 했다. 좋아하는 신부님 강론을 찾아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뉴스를 보며 정치 논평을 하기도 했다.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나 성당을 검색해 보기도 하고 집 앞 재래시장에서 저녁거리로 먹거리를 사 오기도 한다. 해질녂에 단지 안을 산책하기도 하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하기도 한다.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서 내려야 되는데 눈을 떠보니 동인천 역에서 내린 적도 있었고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왜 살아야 되는지 굳이 이유를 찾지 않고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한평생을 살아온 자의 삶의 여유는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대번 9시만 넘으면 잠이 오니까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다섯 시면 눈이 떠서 그냥 일어나는 거지"
"아침 묵주 기도하고 TV 틀어 놓으면 하루가 시작되는 거야"
"농사일 그만 두면 뭐 해야 되나 걱정도 했는데 하루가 금방 금방 가 일상이 그래"
"남산과 경복궁을 하루에 다녀 오려니 시내버스 공부 하느라 핸드폰 들여다보고 있어 "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하루가 재밌어 "
백수의 일상은 지루하지도 않았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멀리 보라색 꽃들이 코스모스처럼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난창 난창 흔들리는 보라색 꽃은 라일락 버베나였다. 작은 꽃잎 들여 한데 모여 큰 꽃잎을 이루고 있었다. 버베나는 아버님의 일상처럼 한데 모여 아름다운 빛깔로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