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밥 먹는 법
잊지 못할 식사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촉수에 남아 있는 음식 고유에 맛과 살아 있는 식감이 지워지지 않은 채 기억되는 음식이 있다.
23살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난 서울 끝자락 경기도 땅 담터에서 자취방을 계약했다. 군 제대 후 근 여섯 달을 노동일로 번 돈을 아껴 자취방에 들여놓을 커다란 더블침대와 중고 책장과 의자 중고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사서 그 작은 자취방에 쟁여 넣었다. 그때가 생애 처음으로 내방을 가진 날이었다.
그전까지 기숙사와 하숙생활로 이어지는 학창 시절은 대여섯 명이 한방에서 생활을 했다. 어떤 것이든 혼자만의 공간과 사물엔 특별한 감정이 깃들기 마련이다. 내겐 첫 자취방이자 나만의 공간이었던 그 어둠침침하고 음산한 두 평짜리 골방은 여느 호텔 부럽지 않았다.
여섯 달을 일해서 번돈은 살림살이를 들여놓기에도 부족한 돈이 란 걸 침대와 냉장고를 사면서 알게 되었다. 서울 끝자락에 붙어 있던 자취방은 집이라고 하기엔 한참 부족한 허름한 구조물이었다. 허연스레트가 비가 새지 않을 정도로만 붙어 있었고 작은 열쇠 구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도꼭지와 연탄아궁이가 어울리지 않은 세간살이를 맞이해 주었다. 자취방 앞으로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야기가 문을 걸어 잠가도 들릴만큼 골목길은 방과 닿아 있었다.
늦은 밤 술 취한 대학생들의 고함소리와 슈퍼 정육점에서 흥정하는 아줌마들의 목소리와 옆방에서 라면 끓이는 냄새와 김치 써는 소리까지 숨겨지지 않는 가난과 정겨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23살 내 자취방엔 언제나 친구들과 선배들로 들끊었다. 우리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장교식당 요리병이었던 내 친구 두일이는 굶주린 우리들에게 비빔국수와 특급요리를 자주 해주었다. 별거 없던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모두 꺼내 뚝딱뚝딱 요리를 해내었다.
찬바람이 불던 많이 추웠던 어느 날 나와 두일이는 배꼬리를 붙들고 무얼 해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나날이 궁상이었다.
그때 갑자기 닭볶음탕이 먹고 싶어졌다. 아무리 장교식당 요리병이라 해도 닭볶음탕 레시피는 쉽지 않았다.
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닭볶음탕 조리법을 물어보았다.
"뭘 해 먹겠다고 아서라 사 먹어" "마늘 많이 넣고 감자 당근 고추장 넣고 우선 조린 후에 닭을 손질해서 탁탁 작게 잘라서 넣어" 양념 맛이니까 아끼지 말고 넣어야 돼. 그리고 자박자박 해질 때 대파 썰어 놓고 다시마와 설탕 양파도 넣어 "
엄마가 불러주는 조리법을 꼼꼼히 적었다. 빨래할 때 사용하던 노란색 들통을 꺼내와 깨끗이 닦아낸 후 엄마의 레시피로 닭볶음탕을 만들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되겠어 "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요리를 믿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며 야채와 고추장을 집어넣고 조리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 번쩍하며 익히 우리에게 길들여진 그 냄새가 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닭볶음탕의 냄새였다. 요리가 되기도 전에 닭볶음탕을 먹은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양파를 다듬고 감자를 썰고 당근을 자르면서 무언가를 해 먹는다는 아득함이 엷어져 갔다. 늘 막연하게만 느꼈던 엄마의 시간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수고스러움을 통째로 느낄 수 있었다.
와 이럴 수가 너무 신기했다.
닭볶음탕이 되어갔다. 식당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달싹하고 달콤하고 매우면서 당기는 숟가락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마성의 맛 이상하리 만치 맛있었던 요리가 되어갔다.
두일이와 나는 노란색 깊은 들통 안으로 까만 머리통을 들이 밀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발라먹고 하얀 쌀밥을 넣어 비벼 먹었다. 색이 벗겨진 노란색 들통은 그렇게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닭볶음탕은 우리를 발우공양하는 스님으로 만들어 주었다. 노란색 들통의 바닥이 보였을 때 이마부터 셔츠로 등판까지 땀이 맺혀 있었다.
이상하리 만치 맛있었던 그때의 닭볶음탕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맛은 사라지지 않고 숙주 안에 박재된 체 어느 날 찬바람과 함께 찾아온다.
그때의 닭볶음탕 알싸한 그 맛이 밀치고 들어온다.
굶주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었던 깊은 맛,
같이 먹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묘한 그 맛은
함께 밥 먹는 법을 알았던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