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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Nov 12. 2023

아내의 친구들

아내의 여수여행

아내는 회색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여행의 시작은 아내가 회색용 가방을 꺼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여행용 케리어는 여행기간과 여행 목적지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이번 여행에는 중간 크기의 회색 여행용 가방을 꺼내와서 여행에 필요한 겉옷과 속옷 양말  하나하나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내는 빈틈없고 꼼꼼한 성격이라 여행 가기 전에 A4용지 가득 필요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적어 두고 하나씩 챙기기 시작한다. 여행계획 여행맛집 여행경비 여행준비물 등등 마치 체크리스트 점검하듯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는 비장함으로 물건들을 챙긴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다 쌓인 가방을 나르는 일과 나만이 사용할 면도기와 헤어스프레이를 챙기는 게 전부이다. 무임승차도 이런 무임승차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날에는 이런 여행가방이 세 개가 가득 짐으로 채워진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수로 놀러 가는 날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비가 내렸다. 다섯 명의 고등학교 동창들은 이렇게 미루고 미뤄오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다섯 명의 친구들이 모이기로 한 아파트로 아내를 바래다주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빗줄기는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아내 친구들을 보았다. 코로나도 있었지만 코로나가 아니어도 볼 기회가 없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

"어머 안녕하세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아내 친구들 만난다고 아침부터 수선을 떨며 옷치장을 한 덕분인 듯 젊어졌다는 빈말을 들었다. 아내가 사준 짙은 청바지를 입고 청난방 흰색라운드티를 받쳐 입었다. 아내가 입으라는데로 입으면 곧잘 옷 잘 입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근데 그게 빈말이라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걸 보면 늙을수록 젊어 보인다는 말보다 좋은 건 없는 듯하다. 볼로장생은 진시황만의 꿈은 아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아내의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 보였다. 슬프지만 그렇게 보였다. 아마도 나 역시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노화는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징표가 되어 떨어지지 않는 부적처럼 붙어 있었다.

머플러 속에 숨겨진 목주름과 짙은 화장 속에 묻혀 있는 입가 주름, 마치 지워지지 않는 자국처럼, 원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처럼,


그중 한 친구분은 아내의 말처럼 열심히 관리받은 흔적이 느껴졌다.  탱탱한 이마와 잔주름이 보이지 않는 눈가 모두들 한두 군데씩 현대의술의 힘을 빌려 노화를 늦추기 위해 노력 한다고 했다. 나이 듦은 어느 날 갑자기 택배상자처럼 배달된다. 받고 싶지 않은 성적표처럼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지만 아내의 친구들은 그렇게 다정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아온 시간들은 이런 낯섦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마법을 부려준다. 다섯 명의 친구들은 서로의 주름에 신경 쓰지 않는다. 곱게 늙어간다는 건  이렇게 시간을 나누며 서로의 노화를 공유해 주는 것인 듯하다.


"오빠 애들 있잖아"

"지혜는 금은방에 가서 명품로고 들어가게 팔 치를 만들어서 두 팔에 차고 다닌다 그 무거운걸 팔에 차고 다녀 "

"그래! 나이 들면 허전하다고 노인 어르신들 보면 목에 손가락에 팔목에 몸에 두룰 수 있는 거는 다 두르고 다닌다고 하잖아"


"금이 열 돈도 넘는 것 같아 그 무거운걸 몸에 차고 다니니까 애들이 힘도 좋더라고 "

"내가 안 무겁냐고 물어봤더니 습관 되면 안 무겁고 이걸 차고 다녀야 든든하다고 하더라고"



"애들이 얼굴만 늙어가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마음도 늙어 가더라고"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늙으신 엄마 생각이 났다. 몇 해 전 엄마는 몇 해를 절약해서 모은 얼마 안 되는 쌈짓돈을 무릎 수술할 때 사용하셨다. 계좌에 쌓여 있는 숫자들이 엄마에겐 큰 위안이 되었던 듯했다. 어느 날 텅 빈 깡통계좌를 보며 삶의 낙이 없어졌다며 전화로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그게 모라고 허전해 많이 허전해"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추석 용돈을 두배로 드렸다. 모를 일이다. 늙을수록 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심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되는 걸까  

다행일까 아내는 성당 묵주 외에는 몸에 금부치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한 이유는 금부치를 달고 다닌다는 걸 알아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 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아내의 계좌엔 오늘도 차곡차곡 숫자가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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