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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Sep 23. 2024

아내의 체크 리스트

아내의 능력 2

아내의 체크리스트


저녁 식사를 마친 아내가 서재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면서도 생각은 딴 데 가있는 게 분명했다.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한 아내는 마치 인도 명상 전문가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 램프 지니라도 불러 내듯이, 들릴 듯 말듯한 차분한 보이스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단전호흡의 편안함을 수련하듯이, 꼿꼿한 자태와 호흡으로 주변을  평온하게 만들어 나간다.



무엇인가를 외우고 있을 때나, 집중하고 있을 때, 어딘가에 몰입해 있는 아내는 성모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조용한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그렇게 아내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한 페이지씩 넘기며 어쩌면 읽어도 잘 외워지지 않는 성경절을 외우고 있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외운 다는 건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가끔은 방금 전에 했던 말도 기억나지 않았고,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면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으로 들릴 때가 많은 나이 때가 아닌가! 이주 남은 성당 성경시험을 앞두고 세 남자를 몰아 붙인다. 특히 나와 주완이는 아내 눈에 차지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며 소파에 앉아 모범을 보인다.



이렇듯 나에겐 없는 능력이 아내에게는 많이 있다. 그건 나에게 행복일 때도 있고,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는 동기부여 일 때도 있고, 더러는 그냥 묻어가는 젖은 낙엽일 때도 있다.


아내는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준비할 때,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가진 힘을 잘 분배할 줄 안다. 이 역시 나에겐 없는 아내의 능력이다.



여행을 간다고 치면, 우선 아내는 어디를 가야 되는지부터 꼼꼼히 가성비와 효율성을 인풋대비 아웃풋을 뽑아낸다. 나에게 가끔 물어볼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 결정하고자 하는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게 갈 곳이 정해지면 초집중 모드로 몰입하게 되는데, 우선 이면지에 체크리스트를 작성한다.

마치 회사에서나 관공서에서 진행되는 예선과

본선 진행 시 사용되는 체크리스트처럼,

동선과 시간대에 따른 준비물을 구분하고 하나하나 적어간다. 거기엔 없는 것이 없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체크리스트가 작성되어진다. 참석 장소에 따른 옷의 종류와 색상과 속옷의 개수와 긴 양말과 발목양말까지 구분해서 체크한다. 거기엔 반바지와 긴바지, 먹을거리의 종류와 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도 구분되어진다.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이 필요할까! 우비가 필요할까! 우산은 삼단 자동우산일까!  긴 우산일까! 신발은 그래도 장화와 슬리퍼도 챙겨야겠지!



중얼중얼 아내는 마치 어려운 미적분을 풀어 나가듯, 너무 한 군데만 앉아 한쪽만 푹 꺼진 소파에 앉아,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동그라미를 치고 날짜를 적고 또 생각을 하고,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음이 평온 해진다. 아내의 마음은 아주 쉽게 나를 전염시킨다.



체크리스트로 사용하는 이면지 두장은 가지런한 정자로 한 획 한 획 빼곡한 글씨로 채워지고 손 때가 뽀얗게 묻어간다. 아마도 두장의 체크 리스트는 자주 보는 노트 귀퉁이처럼 흐물흐물 해질 것이다.


 마치 고전을 펼쳤을 때 보게 되는 오래된 서적에서나 느낄법한 사람의 손때와 정성을 거기서 보게 된다. 그건 오직 나만 알아볼 수가 있다.


 아내가 그걸 얼마나 정성 들여 고민하며 적어 갔는지를, 그리고 하나하나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에 포개여 넣었는 지를, 닳아 없어진 체크리스트는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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