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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Oct 26. 2024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

산책길에 만난 사람들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


아내와 양재동 꽃시장을 다녀온 오후였다.

그날 오후 가을 숲향기는 더 진해져 있었다. 어쩌면 아내 손을 잡고 가을 숲길을 걷고 있어서 모든 게 좋게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자주 가는 성당 옆 칼국수 집은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게 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던 건 눈부신 가을 햇살과 숲향기를 펄펄 날리는 바람과 온통 다홍빛으로 변해가는 낙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서 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기분은 이런 것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십 분여 기다렸을까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비좁은 가게에는 늘 단골손님들이 넘쳐났다. 돈가스와 주꾸미 볶은밥, 행복을 부르는 조합으로 점심을 먹은 후 바로 옆 카페를 들렸다.


"오빠 우리 테이크아웃 해서 걷자" "날씨 너무 좋다."


산본 중앙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걷기에 좋았다.


산책길 옆 작은 공원 안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공원 주변 상수리나무 밑으로 소복이 내려앉은 갈색 낙엽들은 포근해 보였다. 우리는 낮은 언덕 주위로 잘 닦아 놓은 산책길을 걷고 있었다. 나의 왼손은 아내 오른손을 잡았고, 나의 오른손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잡고 있었다.

아내와 걷는 가을 산책길이 더없이 행복했다. 은은한 커피 향이 내 곁을 따라 동행해 주었다.

그때였다. 작은 공원 언덕 위로 세네 살 정도의 아이들이 머리를 쑥 내밀며 나타났다. 아이들은 일제히 손을 잡고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웃어 주었다. 공원은 산책로 보다 위쪽에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면 보일 정도의 높이였다.  마치 숨바꼭질 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확 하고 모습을 드러내듯 뿅 하고 나타난 듯했다. 아이들은 천사 같았다. 아이들은 낙엽을 주으며 가을을 줍고 있었다. 어느 어린이집에서 나온 걸까 아이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에서 낙엽을 줍고 있었다. 노란색 낙엽과 빨간색 낙엽을 주워 작은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제철 과일을 찾아 먹듯, 오롯이 제철 계절을 온몸으로 담아내는 아이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가을을 즐길 줄 아는 아이들 이였다.

아이들은 낙엽을 줍고 낙엽 위를 뒹글고 낙엽 향기를 맡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가을은 이미 아이들 몸속 깊숙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 인지를 알아갈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마도 가을을 아이들만큼 보내지 못해서 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저렇게 계절을 비비고 느끼고 즐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 난 오래전에 보았던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의 첫 장면이 생각이 났다. 노란색 낙엽이 만발하던 대학 캠퍼스 안 해리와 샐리는 처음 만난다. 특히 해리와 샐리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드는 뉴욕 공원에서 자주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봤어"

"응 가을이 기억에 남지"


아내와 나는 까마득히 오래전에 봤었던 영화 이야기를 하며 다시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붙여왔다.


"이게 누구세요"

"뒷모습이 쌍둥이 엄마 아빠 같더라니 맞네요"


성당 수녀님 이였다. 한 손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며 산책을 하고 있는 듯했다.


"네 점심 먹고 날씨가 좋아서요"

"참 보기 좋아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딱 이맘때 낙엽은 다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매년 이맘때는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 한없이 포근하고 좋기만 한 가을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핸드폰은 꺼두어도 좋다. 적어도 그 정도의 호사는 누려야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가을 흙냄새가 진해지기 시작했다면, 바쁜 일상은 내려놓고 걸어야 한다. 거긴 어디라도 좋다. 나무들이 있다면 어디라도 좋다. 작은 공원이어도 좋다. 걷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냥 행복해진다. 그리고 아이들처럼 낙엽을 주워 담아보자. 비비고 냄새도 맡고 누워도 보자.

아내와 걷는 산책길 그 보다 좋은 게 또 있을까 영화 제목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행복한 하루였다.

아내와 걷는 산책길에,

가을낙엽과 가을햇살과 아이들이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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