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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통지표

어느 날 나란 사람과 마주칠 때 이야기

by 둥이

생활통지표


지금도 생활 통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학교 때 받은 생활통지표에는 항상 비슷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내 기억에는 그 아이가 지닌 독특한 성격보다는 어렴풋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애매한 말들이 생활통지표에 적혀 있었다. 그런 말들에는 집중력이 떨어지며 주의가 산만하다라든가, 주의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다라든가, 그림을 잘 그린다. 글짓기를 잘한다. 글씨를 잘 쓴다. 친구들을 잘 도와준다. 책임감이 강하다. 솔선수범한다. 대략 이런 말들이 생활통지표에 적혀 있었다.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선생님들은 교육부에서 정해놓은 준칙대로 매학년이 끝날 때나 학기가 끝날 때마다 자신의 맡은 학생들을 일일이 생각하며, 생활통지표에 적어야 할 내용을,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이, 아 이게 적당하겠구나 하며 적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말이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매뉴얼처럼 되어있는 여러 개의 말들 중에, 아이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어떤 적당한 말들을 선택해서 쓴 것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업성적을 구분해 주는 수우미양가처럼,


생활통지표에 적혀 있는 그런 말들은 이상하게도 기분을 나쁘게 한다거나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생활통지표를 읽어보고 그냥 아 내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다. 옆 친구의 생활통지표에 적혀있는 말들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아이와 전혀 다를 때도 있었고 족집게처럼 아 맞아 수긍이 갈 정도의 말들이 적혀도 있었다. 정확하게는 선생님이 판단한 한 사람의 성격분석이 틀릴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반대로, 우리는 생활통지표에 적혀있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나를 원만하다고 했으니까 아 나는 원만한 사람이구나 생각을 했고 그 프레임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맞춰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느 순간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이런 종류의 자기 분석표를 매년 받지는 않는다. 통과의례처럼 이십 년 가깝게 받아왔던 생활통지표를 어느 순간부터 받지 않는데서 오는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이십 년 동안 길들여진 생활통지표에 적혀 있는 나는 또 다른 나와 늘 동행을 하지만, 같을 수도 없었고 또 크게 다를 수도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의 눈으로 보게 되는 이미지로 쉴 새 없이 분석되고 세포분열처럼 쪼개여진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정신분석과 성격동향을 끊임없이 생활통지표라는 실록에 남겨두게 된다.


그렇게 나의 생활통지표에 매년 적혀있었던 (매년 담임선생님들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년도의 생활통지표를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만하다는 말은 그냥 언젠가부터 내가 되어갔는지 모른다.


실제로 난 대체로 많은 친구들과 그리 나쁘지도, 그렇다고 그리 좋지도 않은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시간을 보내었다. 개중에는 한두 명의 친한 친구들은 있었는데, 한동네 살았던 친구였거나, 나와 성적이 비슷한 (내 기억으론 그래도 중상위권) 친구들 이였다. 나를 싫어하는 애들도 없었던 것 같고, 내가 그렇다고 좋아라고 쫓아다녔던 친구들도 없었던 것 같다. 그게 원만하다는 개념에 들어가 있는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대체로 깊은 관계보다는 얇지만 모두에게 좋다는 평을 받기 위해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때론 그 원만하다는 관계는 누군가엔가는 만만하다로 보이기까지 해서 가끔은 함부로 대하거나 선을 넘어오는 친구들도 많았다.


원만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니어서,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만만한 사람이 되어갈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지만, 난 계속해서 사람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갔다. 그게 나빴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왜 여전히 누군가에는 만만한 사람으로 보여서, 난처한 경험을 겪게 되는지, 그 원만한 사람이란 게 싫어질 때도 많았다. 모질고 독하지 못한 것이 세상 살아가는데 이렇게 힘들게 하는구나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아마 앞으로의 남은 인생도 난 그리 독하지도 모질지도 않은, 사람 좋다는 평을 받아가며, 그렇게 원만한 사람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확정 지어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살아온 시간의 관성으로만 본다면 난 충분히 그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가끔은 선을 넘는 사람들도 만날 것이고, 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만날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우리는 생활통지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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