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열네살 소년의 짝사랑
그 아이를 만난건 열네살 때였다.
그때 난 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그 아이는 두명의 친구들과 팔창을 낀째 반대편에서 걸어 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학교 운동장 그곳에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바람은 소리도 없이 앞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뎅그렁 거리며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귀에 닿지 않았다.
종소리는 소리로 다가오지 않았고 울림이 되어 촉감으로 다가왔다. 손으로 만져 질듯 등줄기를 타고 전신을 어루만졌다. 물결처럼, 파도처럼, 안개처럼 잔잔히 스며들었다. 손가락 마디 마디는 긴장감으로 뻣뻣해졌다. 그곳은 깊은 물속으로 잠겨버려 소리와 빛이 굴절 되어 사라져 버린듯 했다. 쏟아지는 봄 햇살은 교실 창문에 부딪혀 아이들의 얼굴로 퍼져나갔다. 아이들의 얼굴위로 빛 그림자가 반짝 거렸고 아이들은 손바닥으로 햇살을 막았다. 그순간 주위에 소음이 사라지더니 작은 종소리가 귓속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조금 후에 어디선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이유 없이 소리 지르며 운동장을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미친사람 처럼 그냥 날뛰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급격한 호르몬에 변화가 심장박동과 혈류의 흐름을 붙잡지 못했다. 심장은 풀무질 하듯 뛰기 시작했고 소년이 어찌 할수 없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갔다. 한마디로 감정을 주체 할수가 없었다. 마치 내 심장이 아닌듯 의식밖에 독립기관 처럼 때와 장소 구분없이 호흡했다. 짝사랑은 열네살 소년을 그렇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연습도 없이, 벼락치듯 , 그냥 그렇게 한여름 소나기 내리듯 온몸을 적셔 내려갔다. 피할곳도 없이,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걸었다. 감정이 이끄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체 그냥 마음이 이끄는 데로 걸어나갔다. 때론 화사함으로, 때론 우울함으로, 여러 가지 색깔로 갈아입은 감정들이 그곳에 있었다.
열네살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열네살 소년은 그렇게 동갑내기 소녀를 운동장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그때의 기억은 어제일 처럼 또룟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듯, 카메라 렌즈는 그 소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걸 그때 알게 되었다.
첫 만남 ᆢ
아마도 모든 만남이 그러 하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소녀의 두눈은 그날의 운동장 한가운데서의 만남을 담지 않았을것이다. 그것은 30초도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였다. 느닷 없는 솟구치는 감정이 어떤건지 알수 없었다. 소녀에게는 막상 평상시와 다르지 않을 하루를 보내며 교실로 가는길이 였을 테지만 교실로 걸어가는 세 소녀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소년에게는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다르게 흐르는 공간 이였다 . 마치 메트릭스 한장면 처럼 큐핏트의 총알이 느리게 천천히 소년의 심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적어도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 스쳐간 만남은 순식간에 쏟아붓는 장대비 처럼, 꼼짝없이 온몸을 적시고야 마는 여름 소낙비처럼, 그렇게 피할수 없이 운명처럼 찾아왔다.
까만 단발버리,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 진남색 상의자켓 옅은 하늘색 청바지 하얀 양말 갈색구두 작지 않은 적당한키 작은 얼굴에 또룟한 이목구비 서로에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아이들중 유독 빛나 보이던 열네살 소녀의 얼굴은 소년이 그때까지 본 사람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정오의 햇살은 정수리로 떨어지고 있었고 키작은 그림자만이 소녀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어떤 만남은 이렇듯 누구에게는 특별함으로 남는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만남이 있다. 누구에게는 첫만남 일테지만 또 누구에게는 그냥 만남이 아닌 스쳐감 아니 지나침 이기도 한게 만남 일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열네살때 학교 운동장을 걸어 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녀아이를 보았다. 나에게는 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일듯 하다. 그 풍경은 소년의 시선이 그려놓은 한폭의 풍경화 일수도 있다. 열네살 소녀의 존재가 그 소년의 의식속으로 들어온건 1985년 따뜻했던 오월 어느날이었다.
그해에 난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열네살이였고 갓 구어낸 물건처럼 싱싱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그런 나이였다. 내 머릿속은 온통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고 시간을 다르게 흐르게 만드는 그 아이 생각으로 꽉 채워졌다. 내게 열네살은 그런 나이였다.
복도를 지날때나 화장실을 다녀올때 스쳐가듯 보게 되는 소녀는 나라는 존재를 모르는듯 단짝 친구와 웃으며 지나갔다. 보는것 만으로도 참 좋았었다. 그렇게 한학년이 올라가서야 그 아이와 같은반이 될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풋풋함과 설레임이 그대로 내속에 있다. 나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열네살 이다. 나의 영원한 일부인 열네살의 나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주기를 기다린다.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그 장소에는 분명 선명한 울림으로 소녀는 웃고 있을테니까
그 아이는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을 뛰어 넘었다.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을 싹 지워버릴 만큼 그 아이는 아름다웠다. 적어도 소년의 눈에는 압도적이였다. 그런 마음은 오랫동안 소년의 마음속을 떠나지 못했다. 소녀를 향한 마음이 양해 없는 일방적인 것이였지만 마음이 가는길을 어찌할수 없었고 어찌할수 없는 마음때문에 애를 태워 야만 했다.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여자아이를 만난것은 태어나서 처음 이였다.
나는 열네살 이였고 그녀도 열네살 이였다.
지워지지 않은 그 기억들, 나에게 열네살의 어느날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된, 그 시간은 초침은 멈춰 서있다.
멈춰버린 그 시간안에 분말처럼 퍼져 있는 것들은 냄새와 장소와 말들과 형태 없는것들의 감정들이다.
그곳엔 풋사과의 과일향 같은 청순함이 있었고 녹색 풀밭의 풀내음 같은 정겨움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개학을 기다리는 막연한 설레임이 있었다. 그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고 전기라도 옮을듯 찌릿 하기만 했던 손잡을때의 떨림도 있었다. 모하나 제대로 할수 없었던 어색함이 있었고 그아이의 여보세요 말을 듣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수백통의 전화가 있었다. 한바탕 쏟아붓던 소나기 처럼 그렇게 밷어 내지 못한 후회가 있었고 걸러 지지 않던 무모한 감정의 색깔과 진한 원색을 감쳐두고 투명한 파스텔으로 그려놓은 순수함의 시간들이 있었다. 치장하지 않는 순백색의 언어와 중량교 새서울극장의 어두었던 스크린과 어느해 친구집에 함께 모여 놀던 크리스마스 이브와 그곳에서 놀다가 잠들어 버린 내 얼굴을 한참을 쳐다 보았다고 말해주던 그 아이의 투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거기엔 수많은 말들과 슬픔과 기쁨과 형태 없는것들의 감정이 있었다. 안녕! 너무나도 짧았던 우리 여름날의 찬란함이여! 보를레르의 시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보를레르의 시처럼 아름답기만한 우리의 청춘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게 얼마나 좋은건가를 정작 느끼기에는 인생의 순서가 바뀌어야만 가능할거라는걸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름답기만한 저 꽃잎이 피고 져야 열매가 열린다는건 시간이 존재하는 의무 라는걸 ..
어느새 우린 중력에 묶여 사는 어른이 되었다. 일년에 한두번 일상적인 안부인사를 전하며, 마치 영혼 없는 인사를 나누는듯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인사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 인사속에는 숨겨둔 열네살소년의 설레임이 담겨있다. 사람마다 소중함이 다르다. 숨겨둔 설레임을 들키지 않으려 의식한체 인사를 나눈다.
소년은 소녀 앞에서 늘 그렇게 서툴렀고 흔들렸다. 단막극 처럼 이어져 있는 기억들이 재방송 방영되듯 가끔씩 찾아온다.
여전히 나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아마 영원히 열네살 일것이다. 영원한 일부인 열네살에서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미소 짓다보면 스르르 행복해진다. 행복이 그렇게 스며온다. 행복은 그리 먼데 있지 않음을 그 소녀가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