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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Sep 05. 2024

행복하다

Day24 Camino de Santiago

 아침으로 뮤즐리를 먹었다. 초코가 섞인 것이었는데 지나치게 달았다.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속이 좋질 않았다. 아침은 건강한 것으로 잘 챙겨 먹어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출이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한 구석에 조금씩 자리한 구름에 떠오르는 해가 붉은색을 선물했다. 늘 해는 우리가 걷는 방향의 반대에서 떠오른다. 해가 완전히 밝아오고 나면 뜨거운 해를 등지고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일출 때는 종종 뒤를 돌아보면 달라지는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좋다. 하루의 시작이 좋다.


 작은 마을을 지나며 다리를 건넜다. 날씨가 좋은 덕인지 하루의 시작이 기분 좋은 덕인지 그 순간의 풍경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어제 터트린 물집이 말썽을 부리기에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며 바닥이 불규칙한 곳이 있으면 주시하며 걸었다. 평소엔 튼튼한 등산화를 신고 걷는 덕에 바닥을 자세하게 볼 일은 자주 없는데 슬리퍼를 신고 걷는 덕에 다른 곳에 시선을 깊게 머물러보는 게 즐거운 경험이었다.


 귀여운 개가 한 자리하고 있는 카페에서 그 개를 보며 카페 콘 레체를 마셨다. 순례길을 걸으며 아침에 야외에 앉아 있곤 하면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카페에 함께 와서 커피를 마시거나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반려동물에 관심 없던 내가 요새 종종 강아지를 마주할 때면 그 모습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과는 다른 반려동물 문화 덕인 것 같다.


 오늘은 걸으며 다른 복숭아나 자몽 대신 양상추를 먹었다. 4봉지를 사 왔는데 한봉은 상한 탓에 3봉만 했다. 아침으로 먹은 뮤즐리가 느끼했던 탓에 속이 편하질 않았는데 양상추를 500g씩이나 먹은 건 처음이었다. 유럽에 와서 유독 양상추를 자주 먹게 된다. 한국에서도 양상추를 좋아했지만 이곳의 그것은 다른 맛을 낸다. 우선 훨씬 단맛이 강하다. 오래 씹다 보면 옅은 멜론향이 난다. 쓴 맛도 없으며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 손질되어 나오는 제품이 잘 되어있어서 가지고 다니며 먹기 편하다. 나의 포카칩.


 순례길에선 생수를 한 병 사서 2-3일 정도 물병대신 사용하고 버리곤 한다. 수돗물도 많이 마시고 길을 걸으며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개수대를 만나면 물을 채워내곤 한다. 늘 평범한 수도꼭지가 있었다. 다만 오늘의 그것은 특이했다. 좌측에 물을 보충할 수 있는 수도가 있었고 그곳에서 물을 틀면 우측 동상의 인물이 들고 있는 병에서 물이 나왔다. 퍼포먼스이겠지만 순례길 위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작고 즐거운 눈요기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고서 방에 들어서고서 창 밖 풍경을 보고 감탄한다. 날씨가 좋은 덕에 수평선까지의 풍경이 깨끗하게 펼쳐진다. 길을 걸으며 하루씩 머무르며 이런 풍경과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요새는 매일이 알캉스라며, 우린 안 되는 게 없다며 행복해했다. 다시 순례길을 걸으면 하루에 걷는 거리를 크게 줄이고 여러 마을에 많이 머물러보며 알베르게 다니는 재미를 찾는 것도 좋겠다.

 오늘의 알베르게에서는 내부시설에 대한 안내가 그림으로 되어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들 중 일부는 주가 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이들에 대한 배려를 이렇게 귀여운 모습으로 하는 것 같다 이뻐 보였다.


 장을 보러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트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풍경들이 되게 아름다웠다. 나는 원래부터도 큰 도시보다 작은 시골마을이나 소도시를 좋아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작은 도시에 머물러볼 기회가 많다 보니 그걸 더 크게 느낀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 그중에도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그것들을 마주할 때면 느껴지는 힘을 좋아한다.


 저녁으로는 쌀국수를 볶아먹었다. 새우, 버섯, 달걀, 양파를 양껏 넣고서 마트에서 발견해 낸 간장소스와 함께 쌀국수를 볶아냈다. 아시안 소스와 아시안 면이 주는 익숙함에서 오는 큰 만족감이 있다. 익숙해서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느끼는 거, 이 길을 걸으며 얻을 수 있는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오늘 마트에 들러서 맥주를 마시려는데 마침 흑맥주가 있기에 집어 들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시고 싶어 했는데 스페인 마트에선 흑맥주를 판매하지 않는 곳이 많은 듯했다. 기네스의 흑맥주였는데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 풍미를 냈다. 한국에서 마셨던 기네스가 초콜릿이나 커피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면 오늘 마신 그것은 특정 풍미가 튀지 않고 쌉싸름한 맛과 피니시에서 고소함을 강하게 남겼다.

 후식으로 망고를 먹었다. 종종 망고를 먹고 싶어 했는데 도구가 마땅치 않거나 잘 익은 망고가 없어서 몇 차례 미뤄두었다. 오늘 마침 타이밍이 맞아 마트에서 하나 골라 들고 왔다. 누나가 별 말없이 자리를 뜨더니 저리 이쁘게 잘라왔다. 못하는 게 없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런 순간들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음에 참 행복하다.


 행복하다. 24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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