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잉'
모처럼 쉬는 날 고양이 햄이와 같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하빈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안녕 친구. 어쩐 일이야?"
"오늘 너 쉬는 날 맞지? 같이 밥이나 먹자. 내가 너네 집 근처로 갈게. 너네 동네에 뭐 맛있는 거 있어?"
오석의 전화에 하빈은 나갈 준비를 했다.
한 시간쯤 후에 하빈은 오석을 만나기 위해 근처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오석이 그녀를 반겼다. 둘이 같이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하빈은 오석의 하빈에 대한 강한 질투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니 내면적으로는 이미 여자인 오석은 외부적으로만 남성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남자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런 감정을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였다. 어쩌다 오석이 마음속으로 호감을 갖는 남자가 있을 때면 오석은 하빈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보이는 감정은 뭔가 더 깊은 듯했다.
"나 얼마 전에 이보검 수의사 만났어.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술 한잔 하자고 하더라고."
오석의 얘기를 들으며 하빈은 그녀가 느끼는 강한 감정이 보검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만나서 뭐 특별한 얘기 했어?"
"그 사람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우리 사이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아직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건지 아님 오래돼서 좀 소홀한 지."
오석은 담담히 얘기했지만, 그의 말에는 아쉬움과 질투심이 묻어있었다.
"너 그 사람 좋아해?"
하빈의 물음에 당황해하는 오석을 보며 하빈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야.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지이잉'
갑자기 하빈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하빈이 쉬는 날 병원 실장이 전화를 하는 일은 드물어 무슨 일일까 싶어 하빈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채 선생님. 김원장님이... 지금 연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이에요."
울음 섞인 목소리의 실장의 말에 하빈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갈게요."
"하빈아 무슨 일이야?"
오석은 창백해진 하빈의 얼굴을 보며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걸 알 수 있었다.
병원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는 은혜선배의 장례식은 학교 동문들 몇 명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병원 실장이 도우미들과 같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빈이 빈소로 들어가자 바닥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정석선배를 볼 수 있었다. 하빈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들어 눈물 섞인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선배, 이게 무슨."
하빈은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메어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빈아. 나 이제 어떡하냐?"
정석은 하빈의 손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빈은 선배의 손을 잡고 같이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참을 같이 울면서 자리에 앉아 있던 하빈은 자신의 감정이 진정되면서 슬픔에 빠져있는 정석선배에서 절망이 아닌 기쁨을 느끼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모르게 선배의 손을 놓고 하빈은 놀란 얼굴로 정석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지금 슬퍼하고 있지 않아.' 자신의 마음속에서 드는 생각에 하빈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정석을 다독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열심히 조문객을 맞는 실장에게 향했다.
실장은 채빈을 보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둘은 잠시 구석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새벽에 원장님이 운동하러 가실 때 김원장님도 일어나서 피곤하다고 하시긴 했는데 괜찮았데. 그리고 헬스장에서 바로 병원 출근하셔서 일하시고 점심때 집에 들르셨을 때 욕조 안에서 의식을 잃은 김원장님을 발견하고 119를 불렀어. 근데 구급대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정지가 와서 응급실로 옮겨져서 사망선고가 난 거야. 신부전이라고 해도 아직 젊으신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하빈은 실장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간호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간호사 수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수정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게 과연 우연히 벌어진 일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하빈은 자신이 직감과 설마 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정석선배에게서 나오는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설마. 정석선배가 이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하빈은 간호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수정을 가까이서 보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간호사 숙이 눈물을 글썽이며 하빈을 맞았다. 숙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하빈은 수정을 쳐다보았다. 수정은 애써 슬픈 얼굴을 지어보려 애썼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환희에 가까운 기쁨을 하빈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정석과 수정은 이 상황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은혜선배를 죽게 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며칠 전 은혜와 밥을 먹을 때 은혜는 자신의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고는 했지만, 매주 병원을 가는 그녀가 상태가 이렇게 안 좋아질 때까지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 죽은 은혜에겐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질 가까운 가족도 없다.
하빈은 멀찌기에 슬픔에 잠긴 남편역할을 하고 있는 정석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