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커피 한잔 더 하고 가실래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보검을 향해 수아가 물었다. 수술 세미나의 마지막 날인 오늘이 수아에겐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혹시나 보검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나 지켜봤지만, 그의 눈은 하빈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전에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알아보고 싶은 수아였다.
"네 그래요."
보검은 흔쾌히 수아의 말을 따라 주었고, 둘은 근처의 커피집으로 향했다. 느끼한 고기 냄새 후에 맞는 향긋한 커피 향은 그들의 기분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은 그동안의 세미나 내용에 대한 서로의 생각도 공유하고 병원생활을 하면서 겪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 얘기하며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게 커피를 마셨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생각한 수아가 물었다.
"선생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자로서요."
"수아샘 귀엽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인기도 많으실 것 같은데. 근데 전 여자친구가 있어서 조심해야 돼서요. 하하"
그동안 하빈에게 관심을 보였던 보검이 갑자기 여자친구 얘기를 꺼내자 완곡한 거절을 위한 거짓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 수아는 솔직하게 물었다.
"그런가요? 전 샘이 하빈이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 못 봤나 봐요."
" 아 그렇게 보였나요? 하빈씨가 매력적인 사람이기는 하죠. 그리고 제가 저도 모르게 바람기가 있나 봐요."
보검은 장난스럽게 수아의 말을 받아쳤다.
"하빈이는 학교 다닐 때부터 항상 인기가 많았어요. 저도 샘이 하빈이 좋아하나 싶기도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나한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을까 물어봤어요. 제가 뭐 속에 담아두고 그런 거 잘 못해서요."
수아는 하빈에 대한 질투심과 자신의 고백에 민망함을 느끼며 말했다. 보검이 진짜로 여자 친구가 있다면 하빈에게 뺏기는 거보다는 어쩌면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영광이네요. 수아씨도 인기 많을 것 같은데요 뭐. "
말로는 수아를 칭찬하면서도, 보검은 수아와 하빈의 얘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없는 여자친구 얘기도 더 이상 수아랑은 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같은 학교를 나온 동기라고 하기엔 하빈과 수아는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아의 하빈에 대한 말투는 지독한 질투심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의 신경전은 보검이 학교 다닐 때도 아주 진저리를 치던 일 중 하나였다. 보검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보검의 앞에서는 쿨한 척하던 여자들에 이미 질릴대로 질려있었다.
"늦었네요. 이제 그만 일어서죠."
보검은 이만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굴에 너무 티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님 나오셨어요?"
하빈은 그녀의 진료실로 들어오는 은혜선배를 반갑게 맞이했다. 처음 하빈이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은혜는 일주일에 최소 2-3일은 하빈과 지내며 진료를 했었지만, 그동안 그녀의 몸이 점점 나빠져 이제는 일주일에 하루도 나올까 말까 했다. 물론 이제는 하빈이 진료에 익숙해져서 은혜의 빈자리를 잘 채워주고 있기는 했다.
"채선생님 오랜만. 미안해. 내가 좀 자주 나와서 채선생 진료도 좀 도와주고 해야 하는데,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은혜를 학교 때부터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동문회 행사에서 보기도 했고, 여기서 일을 시작하면서 하빈은 그녀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은혜는 몸이 안 좋아도 항상 미소를 짓고 주변 사람들은 상냥하게 대하며 친절해 병원 식구들도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그녀의 신부전은 이제 그녀가 투석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해야 할 정도로 진행되었고, 장기 이식까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부모님도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외동딸이었던 은혜에게는 남편인 정석만이 남아있었다. 정석이 은혜에게 장기이식을 하겠다 선언했지만 은혜는 혹시나 다른 공여자가 있지 않을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하는 중이었다.
"우리 채 선생 고생하는네 내가 오늘은 밥 사줄게. 오늘 끝나고 시간 돼?"
"좋죠. 원장님이 비싼 거 사주실텐데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하하"
하빈과 은혜는 진료시간이 끝나가자 둘이 같이 진료실을 나왔다. 맞은편 진료실에서 나오던 수정간호사는 은혜를 보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그들을 지나쳐갔다.
하빈은 은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그녀의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분노라기보다는 슬픈 감정이 전해졌다.
"둘이 어디가? 나도 같이 갈까?"
진료실을 나오는 정석선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석은 오늘 병원 모임이 있었지만 같이 갈 수도 있다 말을 했다.
"아냐. 오랜만에 채선생이랑 둘이 데이트할게. 자기는 자기 볼일 봐. "
은혜는 하빈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정석에 다정하게 얘기했다. 정석을 대하는 은혜의 태도는 항상 애정이 넘쳐났다. 어쩌면 은혜는 정석의 외도를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그녀의 태도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잠시 후 그들은 근처 횟집에서 먹음직한 모둠회를 맛보기 시작했다.
"음 오랜만에 회를 먹으니깐 너무 좋아요. 언니"
하빈은 사석에서는 은혜를 친근하게 불렀고 은혜도 그런 그녀를 동생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다.
둘은 민감한 주제를 피하며 병원얘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가 끝난 후 은혜는 병원으로 돌아가서 커피 한잔 하자며 하빈을 이끌었다.
"난 우리 병원 이층에서 이렇게 바깥 내려다보면서 커피 한잔 마실 때가 참 기분이 좋아. "
은혜의 말이 왜 슬프게 들릴까 생각하는 하빈에게 은혜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빈이 넌 알고 있지? 우리 남편이랑 수정씨 관계. 하빈이 너 입 무겁고 신중한 사람인 거 알고 있어. 그래서 너한테는 내 비밀이 들켜도 괜찮은 기분이 들기도 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빈을 쳐다보는 은혜를 보며 하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너한테는 이렇게 가만히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어머 아니에요, 언니! "
하빈은 당황하며 은혜의 말을 잘랐다. 은혜는 그런 하빈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빈아. 나 너한테 뭐라고 하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스스로 그런 기분이 들어서 괜히 해본 말이야. 그치만 내가 정석이를 너무 좋아해서, 다 까발리면 우리 관계가 진짜로 무너질까 봐 무서워. "
은혜는 진심으로 정석선배를 사랑하고 있었고, 병으로 자신이 그와 활기차게 지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외도 상대인 수정에게도 화가 나기보다 부족한 자신에 대한 서글픈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그녀에게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은혜를 보며 하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은혜는 원래도 마르고 가냘픈 사람이었는데, 병이 진행된 지금은 툭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날의 은혜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그때 하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