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둔탁한 소리를 듣고 하빈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바닥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 전 하빈의 동물병원.
하빈은 진료를 마치고 정석의 진료실로 향했다.
"원장님 잠깐 시간 되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빈의 목소리에 정석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 채선생. 무슨 일 있어?"
은혜의 장례식이 끝나고 이주가 지났다. 정석은 일주일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후 약간은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와 다시 병원 진료를 시작했다. 전과 다르게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런 정석의 모습을 보는 하빈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그와 수정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워졌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가식적인 그들의 모습에 환멸이 느껴졌다.
"저 오늘까지 하고 그만둘게요. 더 이상 여기서 일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
정석은 놀란 얼굴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선배가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혜선배가 병으로 그렇게 되지 않은 건 확실히 알고 있어요. "
단호한 하빈의 말에 정석의 얼굴은 놀람과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아니 난 채선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은혜일로 충격받아서 하는 말로 생각할게. 그리고 얼마간 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장기 휴가 내는 걸로 해줄게."
담담한 척하며 정석은 말을 이었지만, 하빈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과 공포심을 읽을 수 있었다.
"아뇨. 다 알고 있어요. 선배가 한 일. 방법만 모를 뿐이에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하빈은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정석을 법적으로 처벌받을 어떤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그가 누군가는 그의 범죄를 알고 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고, 그로 인해 그가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랐다.
하빈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하빈씨? 저 보검이에요."
뜻밖의 목소리에 하빈은 순간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에 하빈씨 병원이 홍대 근처라고 들었는데, 이 근처 볼일이 있어 왔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병원 끝날 시간 됐으면 저녁이나 같이 해요."
보검은 사실 길 건너편에서 하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아 그렇긴 한데, 제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죄송하지만 다음에 봬야 할 것 같아요."
하빈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지하철 역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긴 하지만, 겨울의 막바지 추위가 있는 2월 말은 병원에서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길도 어두웠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검은 전화를 끊는 하빈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그녀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그때,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그 남자는 빠른 걸음을으로 하빈을 따라갔다.
이상한 느낌에 보검도 그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검이 그들이 들어간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하빈이 정석의 가격에 쓰러진 뒤였다. 또다시 벽돌을 휘두르려는 정석을 보검이 잡았다. 둘은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키가 크고 운동으로 단련된 보검에게 정석은 적수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정석은 보검에 맞아 정신을 잃었고 보검은 하빈을 일으키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빈은 얕은 숨을 쉬며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보검의 119 신고로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했다. 보검의 상황설명에 경찰을 정석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고, 하빈은 구급차에 실려졌다.
다행히도 하빈의 머리부상은 심각하지는 않았고, CT촬영 후 며칠간의 안정과 상태확인을 위해 입원이 이루어졌다. 하빈이 경찰조사에서 언급한 은혜선배에 대한 의혹으로 경찰은 정석 선배의 집을 압수수색했고, 집안에서는 무색무취인 쥐약이 발견되었고, 은혜가 쓰던 식기와 수건에서도 성분이 발견되었다. 이미 심각한 신부전을 앓고 있던 은혜가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된다고 누군가 의심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정석은 범행 후에도 집안을 깨끗이 치우지 않은 것이 그나마 그의 범행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 것이다. 정석선배는 은혜선배에 대한 살인 혐의로 구속이 이루어졌고, 그는 별 저항 없이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그의 연인이었던 간호사 수정역시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고마워요."
하빈은 병원 침대 옆을 며칠째 지키고 있던 보검을 쳐다보았다. 그가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쩌면 하빈은 어쩌면 지금 살아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정석에게 그날 그 말을 할 때도 정석이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은혜선배에게 그런 짓을 했지만 정석에게서 그 정도의 살의를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에요. 하빈씨 병원 쪽으로 가서 전화를 하길 다행이었단 생각이 들어요. "
보검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는 그는 너무 매력적이기도 했다. 깨끗한 그의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했다. 가끔씩 방에 들르는 간호사들도 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기 일쑤였고, 한 간호사는 하빈에 "남자친구분이 너무 잘생기셨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빈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라도 만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일쯤에는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근데 정말 부모님께 연락 안 드려도 되겠어요?"
"이제 괜찮은데요 뭐. 말씀드리면 걱정만 하실 텐데요. 다음 주쯤 집에 가서 말씀드리려고요."
하빈은 그냥도 항상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가 떠올랐다. 감정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 아빠와 늘 감정적인 엄마는 물과 기름처럼 항상 서로 겉돌았다. 그들 사이에서 하빈이 걱정거리를 말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드문 일이었다.
"솜이는 우리 집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좀 낯설어하더니 지금은 자기 집처럼 거실 소파에서 늘어져 잘 자요. "
하빈은 며칠 병원에 있는 동안 보검에게 고양이 솜이를 부탁했었다. 겁이 많긴 하지만 고양이치곤 무던한 솜이는 다행히도 그의 집에서도 잘 적응한 듯했다.
"내일 퇴원하면서 데리러 갈게요.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졌네요."
"그럼 내일 밥 사요. 퇴원하면 비싼 데 가야겠어요. 하하"
보검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은은한 울림을 주며 하빈의 마음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