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 여섯. 남편이 망했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 항상 쪼들리는 가계 상황에 대해 남들보다 저축을 많이 해서 그렇다며 설득력 있게 둘러대던 남편이 더 이상 변명할 필요가 없게 된 그 날. 나는 남편으로부터 전재산을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통보 받았다. 건강만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신의 메시지였는지는 몰라도 공교롭게도 그 날 아침 병원 정기 검진 예약이 잡혀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검진이지만 이것은 꼭 의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남편 회사에서는 정해진 기간 안에 검진을 받으면 돈을 줬다. 돈을 내야 받을 수 있는 검사를 오히려 받고서 할 수 있는 것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잡는 일은 귀찮았고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겨우 기간 내에 연중행사를 치르는 식이었다. 남편과 나는 각각 따로 검진실에 들어가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목소리로 봐서도 태도를 봐서도 사무적인 게 분명한 느낌으로 나에게 물었다.
“우울증은 없으시죠?”
“네.”
꼭 우울증이 없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질문처럼 들렸다. 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대학병원에 근무했던 한인 의사가 새로 개업을 한 병원이라 들렸는데, 다른 병원에서 느껴본 적 없는 어색함이 진찰실 내부를 터트릴 것처럼 팽창해 있었다. 침묵이 다소 오래 이어진다 싶을 때 의사는 건망증 걸린 사람이 습관처럼 반복해 묻듯
“아, 맞다! 우울증은 없으시죠?”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봤다. 나는 뭐 이런 걸 쓸 데 없이 묻고 또 묻냐는 내색을 차마 할 수 없던 나는 다소 가식적일 수 있었던 미소 띤 얼굴로
“네, 없어요.”
라고 답했다. 물론 내 뒤로 검진을 받은 남편도 그러했으리라. 우울증 같은 건 없다고...
검진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있던 마트를 보며 남편은 나에게
“저기 지점에서 사람 구하던데.. 한 번 가봐. 직원 복지 되게 좋대.”
불쑥 말을 내뱉었다. 무의식 속에 꽁꽁 싸놓았던 말이 의식이 봉인이라도 해제된 듯 마트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주술처럼 흘러나와버린 것이다.
“우리, 그 정도로 힘들어?”
남편은 자신의 입에서 엉겁결에 튀어 나온 말을
“아니다. 내가 투 잡을 뛰어야겠다.”는
말로 주워 담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막내딸 규리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친구들과 우리집에서 자게 해달라고 해서 친구들을 불러놓은 터였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아이들 오기 전에 세팅을 마쳤다.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 도착하자 뒷마당에서 소고기 패티를 구웠다. 덥지 않은 적정 온도가 쾌적했다. 일년 중 가장 싱그러움을 뽐내는 초록의 잔디, 가장 좋은 여름의 현려함을 극대화시켜 놓아 그로 인해 솟아오른 행복들을 햄버거와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저녁을 마친 아이들은 어두운 밤을 씹어 먹을 기세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주방 식탁에 앉아 물을 한 잔 들이켰고 어쩐 일로 남편도 지하실 자기 방에서 혼자서 마시던 소주를 내가 앉은 식탁으로 가지고 나왔다.
남편은 침묵과 함께 소주를 두어 잔 들이키더니 자기가 이번에 NFT(대체 불가능 토큰)과 연계된 Ape 코인에 투자를 했는데 손실이 크다는 말을 허심탄회 꺼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 상황이 농담이 아닌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무겁게 다가왔다. 여자의 직감은 참 무서운 것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오래 전부터 파고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끝장을 낸 상황인지 몰랐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것도 고개까지 숙인 채 말을 꺼내는 남편을 보고 경제적 파탄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그래봤자 1~2억 정도겠지 했다. 그런데 남편은 14억을 날렸다고 했다. 내 예측을 뭉툭한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처럼 고통이 둔탁하지만 타격감 있게 다가왔다. ‘뭐라고 14억?’ 안구가 타들어갈 것만 같은 화염이 얼굴에 분사되는 것만 같았지만 최대한 침착해지고자 노력했다.
때마침 건강검진을 하고 온 것은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진짜 같지도 않은 이야기에 나는 세상 쿨하게 반응했다.
“사지 멀쩡하고 먹고 살기만 하면 됐어. 가난은 별 거 아냐. 쓰러진 거 아니고, 직장도 멀쩡히 다니고 있고.. 그럼 된 거야. 어차피 가난 같은 것은 두렵지도 않아. 살아있으니 됐어.”
남편이 죽은 것보다 훨씬 나은 건 어쨌거나 사실이었고, 그래서 이 말은 나의 진심이었다. 남편의 자살을 통해 알게 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상황이었고, 남편에게 화가 나거나 원망의 감정이 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다행인 것은 다행인 것이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난 것이다. 그렇게 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파편들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나의 내면 속 본능은 철저히 달랐다. 내면의 반응을 훑기도 전에 터져버린 말의 속도에 따르지 못했던 감정은 철저하게 분리된 채 뒤늦게 나왔다. 시간차를 두고 나에게 닥친 현실이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들어오자 나는 점점 미쳐만 갔다. 그리고 하루에도 열두 번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나는 감정 통제의 기능이 망가지고 있었다. 온 몸의 수분이 말라, 마지막 목젖으로 타들어 갔고 그 사이 절규가 제멋대로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양손을 쥔 주먹으로 바닥을 쳐대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중얼거리고 신음하고 불평하고 휘청거리고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몸부림치고 매달리고 한숨 쉬고 냉소하고 허튼 소리 해대고 쥐어 짜고... 멍하니 뻗어 있고.. 나는 그랬다.
아침 산책 때에도 나와는 상관없이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자연물들을 보고 흐르는 눈물을 차마 우겨 넣지 못했다. 누가 보는 게 아닐까 싶은 부끄러운 우려와 창피스런 걱정이 격렬하게 솟구치는 슬픔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는 소리가 주변에 퍼졌는데도 하늘은 아무런 동요 없이 처음부터 그랬듯 요동치지 않고 인공이 근접할 수도 없도록 청아하기만 했다. 낙엽이 반 정도 진행된 나무는 생존을 품고 있는 노랑, 빨강, 갈색들의 생명력을 품고 또 뿜어냈다. 나는 내가 슬퍼지고 나서야 자연물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우주의 일부가 아닌 그것들과 전혀 관계 없는 미물일 뿐이라는 것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가 나를 어찌할 새도 없이 거실에 축 늘어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녹아내려 바닥과 한 몸이 된 채 집 천장 샹들리에만 쳐다보았다.
날이 더해갈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 지하실에 있는 남편한테 달려가 어떻게 상의도 없이 대출을 해서 투자를 할 수 있냐고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내 안에 더 이상 눈물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그것이 두통을 유발시킬 때까지 나는 그랬다.
이런 상황 속에 돌아온 것은 더 참담했다. 그가 만들어낸 지옥도 지옥이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그 전쟁통에 그는 멈추지 않고 불쏘시개를 퍼질라댔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날린 것 이외에도 갚아야할
빚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당장 다음 달에 채권자들에게 지불해야하는 돈이 1400만원이랜다. 젠장할! 14억을 날린 게 아니라… 빚이 14억이란 얘기였다. 빌어먹을! 진짜 빌어먹게 생겼다.
상황에 이해가 되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합당한 이유를 찾아 어떻게 해서든 현재를 해석해 보려고 노력하려는 나는 심히 괴로웠다. 그렇게 나는 망했다는 것은
전재산을 다 잃은 것 뿐만이 아니리 빚까지 떠안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그래야 망했다고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으로 망해버렸다.
남편이 투자로 큰 돈을 잃자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대출을 최대한으로 끌어서 받았다. 그것도 부족해지자, 남편은 집담보가 아닌 무담보 대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게 중에는 이자가 28%인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막히게 되자, 남편은 그제서야 우리집 가계에 이 사단이 났음을 털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매일 조금씩 말하지 못했던 실체들을 하나씩 보탰다. 그렇게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나는 빚더머니에서 허덕이고 살고 있었다. 상환해야하는 원금과 이자 그리고 다달이 나가야 할 돈에 우리 5인 가족 생활비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빚이 늘어나는 삶이 내인생에 어퍼컷을 치며 훅 들어온 것이다.
투자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건 작년부터였다. 남편은 투자에 관한 얘기는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의 몸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편의 잇몸은 이 주저앉았고 두어 차례의 수술로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밥을 먹는 도중에 앞니가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치아 전체를 임플란트로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한 달 간 치아 공사를 위해 한국에서 머물렀다. 그 때도 남편은 투자에 관해서는 나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망상이 현실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코인 채굴인가 뭔가를 하겠다고 집안에 온갖 장비를 사다 놓고 돌릴 때부터 이 사람이 언젠가 크게 사고를 치겠구나 하는 것쯤을 눈치챘어야했다. 헌데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아질 것이라고….. 아니…. 어느 누가 그것도 은퇴를 준비해야할 시점에서 거지가 될 거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였던 것도 같다. 적어도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 나는 괜찮은 거였다. 일단, 당장 생계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이 인간 꼴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나마 내가 경제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해결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집을 팔아서 빚도 갚아야 했고 애들도 챙겨야했다. 만일의 경우 대비해 공동 명의로 해놨던 집도 나의 발목을 잡았다. 앞면만 생각해지 뒷면은 인식조차 목했던 것이다. 매매를 하려면 내가 있어야 했다. 또 집을 줄여 이사를 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우리는 이사갈 집부터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마저도 온전히 빚을 내서 가야했기에 예산 또한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사진 상으로는 웬만큼 집들이 괜찮 보이는 사진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집들은 죄다 보기에도 후진 것들이어야 목록에 올릴 수 있었다. 가난이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투명한 하늘이 붉게 물든 나뭇잎에 머금어 살아있는 것 같은 빨강색이 내 눈을 부시게 만들었던 가을날, 우리는 투어를 예약해둔 집 앞에서 부동산 중개인을 기다렸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 있었고 10분 정도를 더 기다리고 나서야 부동산 중개인이 나타났다. 새로 뽑은 것 같은 아우디 승용차 안에서 나온 건 중동계의 말끔한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나왔다. 과하다 싶을 진한 향수가 코 끝에 닿자 약간의 두통이 일어났다.
그의 안내에 따라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갔다. 침수가 되었던 흔적인지 지하에서부터 악취가 올라왔다. 냄새를 견뎌내며 나는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집이 마음에 드냐고 묻는 중개인에게 나는 억지 웃음에
“좋다.”는 소리를 입혀 대답했다. 적은 예산에 이보다 더 좋은 집을 바란다면 양심이 없다고 느껴졌던 탓일까? 되도록 긍정적 반응을 하려했지만 이런 상황을 영적으로 직감했는지 오히려 중개인이 이 집의 구조가 이상해서 별로라는 말과 함께 다른 집으로 이동하자고 랬다. 중개인의 말이 반갑게 여겨진 것은 정말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집으로 향했다. 첫 번째 집처럼 이미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가 비어있는 집이었지만 집안에 배어 있는 특유한 냄새는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처음보다 좋아 보여 만족을 하고 있었는데 중개인은 우리에게 이 집은 이상하게도 다락방을 침실로 표시해서 방의 개수기 하나 더 추가가 되어 있어서 만약 이 집을 사게 되면 나중에 팔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을 해줬다. 통상적으로 중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그의 소신과 양심은 이를 넘어서 있었고 그는 자신이 느낀 바를 그대로 우리한테 전해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두 집을 뒤로한 채 다음 집은 좀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양심 없이 품어 보났다. 그런데 이 집은 문을 열자마자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집을 둘러보는 것도 힘이 들었다. 중개인 역시 우리한테 이 집은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중에 괜찮은 집 나오면 그때 같이 보자고 했다. 우린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야 돈이 되는 부동산 업자가 난생 처음 보는 고객에게 물건을 파는 일을 접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이민자처럼 보여서 있는지 아니면 셋이나 되는 10대 아이들이 있어서였는지… 잘응 모르겠으나 중개인은 우리의 입장에서 결정을 도왔다.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형편없는 지빕들을 보고 다는는데도 아이들 또한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심란해하는 나에게 생각보다 집들이 괜찮아서 괜찮다는 위로를 해줬다. 사춘기 아이들이 이러한데 엄마인 나의 우울은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한 것에 지나지 않있다.
이사 시즌을 놓쳐버려 그마저도 볼만한 집이 없었다. 사실상 그보다더 큰 문제는 집을 팔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처지에서는 순서상 집을 먼저 팔아야 돈이 융통이 되기 때문에 집을 사고 파는 타이밍도 중요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집부터 옮겨야만 했다. 엄동설한 땅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