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뉼이 Oct 27. 2024

아큐정전, 아큐에게서 나를 찾다

아큐정전 

아큐정전은 중국의 민족혼으로 추앙받고 있는 루쉰(Lu Xun 1881~1936)이 쓴 소설로 시골에 사는 아무개이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날품팔이 아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루쉰은 일본 의과 대학에 의학을 배우고 졸업 후에 고국에 돌아가 의사들에게 속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해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그는 영화 속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을 보게 되었다. 화면 속에는 가운데에 꽁꽁 묶인 사람이 있었고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지만 멍청해 보였다. 이들은 러시아군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한 사람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공개 처형당하는 모습을 관람하러 나온 것이다. 이 때 그는 의학이란 결코 중요한 것이 못 되며 국민이 우매하면 아무리 체격이 좋아도 무의미한 공개 처형의 관중 노릇 밖에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해야 할 급선무는 인민의 정신을 개혁하는 일이며 그렇게 문예부흥운동에 뛰어든 것이라 판단,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큐정전은 루쉰이 중국 당대 인민을 계몽하기 쓴 책이기 때문에 인물이 중심이 되는 소설이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인물 자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도 이름도 제대로 된 게 하나 없는 아큐는 집이 없어 마을 사당에 기거하며 동네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늘 정신적으로 승리하며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존심은 매우 강해 허세와 허풍이 강했다. 자신의 성씨나 본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조상은 부자였다 말하기도 하고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는데 자신의 아들은 똑똑하다며 뻐기기 까지 한다. 그런데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또한 강해서 자신의 탈모 흉터에 대해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게다가 자신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기보다 강자 앞에서는 힘도 못 써보고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강자에게 받은 폭력을 약자에게 전가시키는 비루함으로 세상을 사는 인물이 아큐인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 채 자신을 지난 행위를 미화하거나 자신을 포장해 내는 정신승리법이었다. 사람들에게 매를 맞을 때도 모욕이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아들이 부모를 때린다며 자기기만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러한 왜곡 혹은 망각의 방법들이 그를 파멸로 몰고 간 것이다. 


마을의 천덕꾸러기 아큐는 조씨 댁에서 식모를 건드리다가 쫓겨난 뒤 일자리도 잃고 배고픔에 남의 밭에 무를 훔쳐 먹는 등 빈궁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마을을 떠난다. 그가 달라진 모습으로 마을에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의 태도 또한 변한다. 대상의 집에서 일했다는 거짓의 허울을 쓰고 혁명의 이야기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지만 거짓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이는 발각이 되고 그의 위치는 다시 하락하게 된다. 그러나 아큐는 임기응변으로 자신이 혁명당원이라 속이고 마을에서 잃었던 지위를 되찾는다. 그러나 혁명이 초반 성공세를 몰아가지 못하고 실패를 하자 그는 강도 죄목을 뒤집어쓴다. 이때 취조를 당하면서 그는 엉겁결에 자신이 혁명당원이라 진술을 하고 붓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무지의 극치를 달리는 그였기에 동그라미를 반듯하게 그리지 못하고 삐뚤빼뚤하게 그리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이것이 자신의 목숨줄과 바꾼 것인 줄도 모르고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연연하며 처형을 당한다.  


이런 어리석게 죽게 된 와중에도 아큐는 어떤 상황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상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조차 자신이 노래를 제대로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만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저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무지한데다가 주체적 사고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은 결국 남들에게 지배를 받은 채 불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 항거조차 못한다. 오히려 자신 발에 채워진 족쇄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노예로 전락한 채 죽고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 또한 아큐가 왜 죽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그저 그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을 두고 잘못을 한 게 분명하다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심지어 총살은 참수형에 비해 볼거리가 적다며 한탄을 했다. 


아큐정전은 중국인들에게 스스로를 노출시켜 바라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도구다. 루쉰은 감추고 싶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내어 무지몽매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혀 있는 중국인들을 각성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사회를 개혁하기 전에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민족성, 현실 세계에서 무시 받는 것을 자신만의 정신승리법으로 그렇지 않다고 곡해할 뿐 아니라 노예근성에 젖어있는 자기들 자신에 대한 혁명부터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아큐를 통해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아큐를 ‘어쩌면 이토록 찌질한 인물이 다 있지?’하고 답답해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에 접목이 되어 있는 신해 혁명은 청나라가 멸망하며 2천 년간 지속되어오던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적 왕조가 중화민국,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아큐는 혁명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혁명당원이 누리는 권세를 개인의 위신을 높이는데 사용하고자 가입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혼쭐을 내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이는 어쩌면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혁명이 하층민에게까지 흡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층민들은 혁명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어 새로운 체제에 나아가지 못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혁명을 추진한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상층부의 타락으로 사회가 망가졌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혁명을 추진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혁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제를 바꾼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억압받는 자가 주인이 된다고 해서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민의 사고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회의 수준은 인과적으로 높아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혁명 이전에 국민 계몽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국민들이 우매한 상태로 내버려 둔 채 사회를 혁명시키고자 나서면 그 혁명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을 뿐더러 새로운 사회, 진보된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인도의 정신적, 정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96~1948)는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가 되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기 스스로도 혁명시키지 못하고서 혁명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낡은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 지도층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으며 낡은 체제를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또한 아큐를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더 나은 시민의식을 갖춰 나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생각해볼 문제   

루쉰이 아큐를 통해서 경계하고 싶었던 인물상은 무엇이었나?

정신승리법이 위험한 이유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서도 왜 아큐는 항변을 못했는가?

아큐가 처형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경계하는 인간상은 무엇인가?


이전 07화 인간 소외 극복 방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