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회는?
히틀러(Adolf Hitler 1889~ 1945)는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무너졌던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고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독일 경제를 재건해준다는 이유로 독일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런 그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무기를 만들어내 일자리를 창출해내며 입각지를 구축해 나갔다. 외부의 적을 만들고 내부를 단결시키기 위한 희생양 찾기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특정집단 말살정책은 유대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집시, 슬라브인, 동성애자, 장애인들까지도 학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광기어린 행동들 때문에 오늘날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우호적인 발언이라든지 행동은 철저히 금기시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21세기가 되어서도 독일에는 여전히 파시스트를 그리워하며 히틀러의 망령을 끌고 가는 극우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는 비단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역사 또한 한 때 독재 시대를 거쳤지만 지금도 그 시절에 대한 비판보다는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독재는 사람들의 사상과 의견을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독재자는 사회 구성원들의 개성을 짓누르고 획일화 교육을 통해 개인의 다양성을 말살하며 우매한 대중을 양상하고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이러한 메카니즘이 정당화되고 고착되면 될수록 대중은 더더욱 어리석어진다. 그리하여 대중은 독재자가 쏟아 내놓는 온갖 권모술수를 진실인 양 착각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말도 안 되는 신화들조차 여과 없이 사실이라 믿게 되고 독재자의 메시지와 그 의도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신뢰가 대중에게 형성되면 독재자는 언론을 정권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방향으로 변질시키는 작업을 착수한다. 이에 호도된 사람들은 정말 그 사회가 천국과 같았다며 왜곡된 사실을 진실인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독재 정권에 대한 미화는 국민 우민화의 필수적 과정이다. 이 정책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나쁜 놈들 싹다 잡아가 순화교육 시키던 그 시절이 살기 좋았지.”,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해.”하며 독재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지도자가 국가가 대적하는 공공의 적을 맡아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며 이에 반대의 목소리는 일사분란하게 막는 것을 보고는 ‘좋은 시절’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그들이 선동하는 바와 같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제해주는 구원자도 아니고 온갖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착각하게 만들거나 세뇌를 시키는 전술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일 뿐이다. 대표적 예로 미국의 ‘적색공포(Red Scare)’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국민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포와 히스테리 열풍으로 몰고 갔던 미국 곳곳에 공산주의가 침투해 있다며 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정치인, 문화예술인, 언론인, 교수들을 색출해 내 수감시키거나 직업을 빼앗고 추방을 시킨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야기시켜 대중의 관심을 받고 해결사가 되어주겠다는 감언으로 인기를 이끌어내면 이를 이용하려던 사람은 자신의 의도대로 정치판을 주무를 수 있게 된다. 이를 제대로 활용한 정치인이 매카시였고, 이러한 현상을 그의 이름을 따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고 부른다.
매카시즘과 같은 현상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반공주의가 국시였던 시절 색깔론 시비는 독재를 유지해주는 무소불위의 마법 지팡이가 되어주기도 했다. 이때, 사법살인도 버젓이 자행되기도 했다.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정부가 발표한 사건인 ‘인민 혁명당 사건(人民革命黨事件)’은 아무런 죄가 없는 지식인들을 두고 국가 제체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유로 기소해 급속히 사형 선고 및 집행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간첩 조작 사건인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을 고치려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이에 대한 비판의 여론이 일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사건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냈고 그렇게 동베를린에 거주하던 지식인들과 유학생들은 독재 군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하면 이를 굳건히 하기 위해 신격화작업을 거쳐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시키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불안감과 불만을 자극할 수 있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그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며 자신들이 실체가 드러나고 입지가 불리해질 때마다 이를 자극해 무마시킨다. 뿐만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방해가 되는 국민이 있다면 그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킨다. 그렇게 독재자는 “짐이 곧 국가요, 국가가 곧 짐이다.”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표현도 없다. 그러나 국가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며 한 개인만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독재는 분명 나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직접 겪고서도 아직도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 속에 버젓이 벌어지게 만드는 무지는 독재만큼이나 나쁘다.
프랑스 작가이며 언론인인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988~1948)는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망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국가 권력이 부당한 것들을 요구할 때 인간은 이를 주체적 이성을 가지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지 못한 채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악의 평범성’이 난무하게 된다. 이것이 선량한 시민이 악을 강화시키고 견고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게 되는 과정이다. 도덕성이 떨어지는 국가에 충성하며 맹목적으로 이에 따르는 것은 무지한 탓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악에 동조를 통해 세상을 더욱 나쁘게 만들며 개인의 도덕성 또한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나쁜 결정이나 비윤리적 행동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이와 같은 발언으로 일찍이 사상과 의견 표현의 자율권의 중요성을 일찍이 강조한 바 있다. ‘나쁜 것’ 보고도 ‘나쁘다.’고 할 수 없을 때 우리 사회는 정의로부터 멀어지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일지라 해도 그의 발언의 자유권을 위해서 모두가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 문화가 높은 사회 등등 사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사회의 기본은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인식하는 시민들과 이것이 통용되는 공동체 속에서 건설된다. 인간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때 우리는 ‘부당한 것들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생명과 재산 안전 등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형성된다. 이 단순한 진리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힘이 되어준다. 따라서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건전한 행위이며 인간의 자유가 억압되지 않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생각해 볼 문제
독재가 나쁜 이유를 서술하시오.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증가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서술하시오.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할 때 왜 우리는 나쁜 결정이나 비윤리적 행동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지 설명하시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회는 왜 건강한 사회인지 생각하여 서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