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인생! 부속품이 아니다
재산 또는 명예 혹은 건강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예기치 않게 닥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시련과 고난은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것이지만 막상 이런 것들을 접하게 되면 크나큰 상실감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로 인해 남은 인생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인식될 것이고 이 때문에 남은 인생의 시간들을 불행하게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이런 시각과 초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다보면 우울해 지기가 쉽다.
하지만 인생의 일부를 잃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인생은 계속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상은 존재의 결여와 결핍에서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인생은 불완전 연속인데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 사라진다고 해서 남은 인생을 몽땅 망했다고 여길 만큼 극단적인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인간이 불안전한 존재인데 어차피 인간이 완벽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들 인생에 있어 결핍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열등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실 결핍을 채워나가기 위해 목적의식을 갖고 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삶을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이를 통해 세계를 끊임없이 해석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사람보다도 돈이나 성공, 명예 등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가치가 전도된 인생을 살면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들에 의해 정작 인간의 가치가 뒤로 밀려나게 되면 사회가 정해 놓은 일정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된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자식의 성적에 따라 조건부 사랑을 주기도 한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의 수순을 착실히 밟아가는 인생에 연연하다 보니 이에 충족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하며 못 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조건들 속에 인간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되짚어야 할 것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말이다. 이를 반성적 성찰의 자세로 우리들 스스로에게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린마일’과 ‘미저리’ 등 50여 편의 소설을 출판한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은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밑바닥 인생을 끌어 올려준 것은 문학이기에 예술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그의 작업실 중앙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예술보다 인생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순간, 그는 그의 책상을 방 한 구석에 붙여 놓았다. 문학은 삶의 일부분이지 그것이 인생을 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이는 비단 스티븐 킹,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인생 그 자체지, 예술과 같은 부속품이 아니다. 그것이 돈이든 능력이든 직업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입장에서 철학적으로 분석을 해놓은 학파가 바로 실존주의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그 누구도 세상을 선택해서 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설명을 한다. 이렇게 피투가 된 인간은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고 인생은 꽃길만 걷는 행복의 향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착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꼭 부와 명예를 얻게 되는 동화 같은 결말이 기다리는 곳도 아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산적해 있는 부조리한 공간이기에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해 인간은 고뇌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이 이런 것을 혼자서만 억울해 하며 원망만 하다가 인생을 허망하게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인생이 이로 인해 달라지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궁극의 목적을 향해 던지는 기투의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고 실존해 나가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삶은 절망의 또 다른 면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절망이 바닥을 치면 희망이 반동처럼 솟아오르듯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것들로 죽는 순간까지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완벽한 행복, 이상과 같은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면서 자기기만에 빠지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본인 스스로의 인생을 창조해간다면 인생을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최악의 환경과 조건 속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나가면 그만이다. 다행인 사실은 행복은 상황보다도 관점의 영향을 크게 받기에 아무리 불행한 환경과 조건에 놓여 있다 해도 본인이 행복을 선택한다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기준에 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감정과 주관의 세계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존주의 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예술 작품이 있다. 밴드 그룹 데이식스의 멤버 Young K가 쓴 노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이다. 작품의 가사를 살펴보면 장미가 피어난 환경은 장미가 있어야 할 정원이나 화단이 아닌 건물이다. 하지만 이 척박한 환경에도 장미는 굴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고갤 들고 버티겠다는 주체적 의지를 표출한다. 이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삭막한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고, 모두가 그의 향기를 맡고 취해 웃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삶의 목적의식을 찾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축하하며 자신이 실존하고 있는 인생의 의미를 부여했다.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전염을 차단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환부가 있다고 그로 인해 썩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환경일지라도 그러지 않게 만드는 의지와 노력은 삶을 구제해 나가는 좋은 방법이 된다. 외부의 것들을 탓하며 주어진 것일지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떤 미래가 펼쳐지든 자신에게 당당하고도 유의미한 유산이 될 것이다. 몇 분 안되는 노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를 통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김춘수(1922~2004) 시인의 작품 ‘꽃’ 또한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이 타인에게 인식되지 않는 즉자적 존재 즉 ‘실재’에 불과한 ‘하나의 몸짓’이었을 뿐인데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는 ‘꽃’이 된다. 타인에게 가치 있는 존재인 대자적 존재가 되면 ‘실존’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공존재’로 나아간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짐으로 피투(주어진 것)되어 실재하게 되지만 동시에 기투(선택하는 것)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태생적 환경으로 존재가 정의될 수 있지만 매일의 선택으로 이를 충분히 바꿔나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아닌 시작을 나 자신을 완성하며 마무리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삶 속에 누군가가 자신을 인식하고 상호작용를 하며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실존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적인 의미가 생기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하나의 눈짓’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인간이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물질과 현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어 나타나는 인간 소외를 해결해 주는 좋은 방안이 된다.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가 물질적인 혜택 속에서 살게 해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서적 혹은 정신적 궁핍 속에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개인들이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이뤄나갈 때 소외는 극복이 된다. 다시 말해 공동체 사회로의 회귀를 돕는 ‘관계 맺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실존적 존재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주어지 인생 속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의미를 만들어 내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갈 때 실존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생각해볼 문제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의 입각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해보자.
실존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 ‘피투’와 ‘기투’는 각각 어떤 뜻이며 둘의 차이는 무엇인지 설명해보자.
세상에 던져져 실재하고 있던 것들 중 내가 인식함으로써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된 대상(사물 혹은 인간)을 찾아 서술하시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로 본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이를 이름을 불러주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나만의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서술해보자.
. 실존주의와 관련해 인간 소외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