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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Mar 22. 2021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

엄마


언제 봐도 고운 사람. 그녀가 저 멀리 걸어온다. 참 고운 사람. 아까운 사람.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부른다. 나는 한걸음 나아가 그녀를 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우리 엄마. 참으로 아깝고 고운 사람. 살아온 65년의 생중 40년의 생을 내 엄마로 살아준 그녀를 때론 너무 미워했고 많은 날들에 미안했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그 많은 세월을 버텨냈을까.



“야야! 밥주걱도 못 들게 생겼더라.” 회현면의 주조장 집. 셋째 며느리가 될 엄마가 첫인사를 오던 날 엄마의 손을 본 할머니는 큰며느리의 전화에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시내에서 시집 온 귀한 며느리의 뽀얀 살이 시골 볕에 그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몸이 약한 며느리를 위해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들을 두셨고 시내에 나가 볼일이 있을 때면 기사님이 동행했다. 엄마에게 새참조차도 내오지 못하게 한 덕에 집안 논밭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하지만 밥주걱도 못 들게 생겼던 며느리의 손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때론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에 각자의 자식을 향한 두 어머니의 마음이 충돌하기도 했다. 엄마는 계절이 바뀌면 늘 할머니를 모시고 시내에 나가 옷을 사 드렸고 때가 되면 미용실에 모시고 나가 머리 손질을 해드렸다. 그리고 귀한 반찬은 늘 할머니 앞에 놔 드렸다.




엄마가 보험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만류하는 아빠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할머니 생의 마지막 흔적을 발견한 것도 엄마요. 눈물로 기도하며 할머니의 가늘어진 다리를 매 만진 것도 할머니의 마지막 세 번의 호흡에 절규한 것도 엄마였다. 어쩌면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받았던 배려와 그 첫사랑이 고마워 그 힘든 시간을 아빠와 함께 버텨낸 건 아닐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난이라는 이름의 허리케인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사라진 뒤 엄마와 나는 늘 전쟁을 치렀다. 전쟁 같은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걸까. 한 움큼씩 빠져버린 내 머리에 하나라도 놓칠세라 약을 꼼꼼히 발라주던 엄마에게 모진 말을 다 뱉어냈다. 엄마는 말했다. 부모는 자식보다 더한 고통이라며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다고.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나처럼 돼 봐.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되레 큰소리쳤다.




내게 삶은 전쟁이라 여겼다.  돌이켜보니 전쟁 같은 삶은 내가 아닌 엄마가 살고 있었다. 엄마는 내게 쉼 없이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다 빠져나가 버린 딸의 민머리를 보며 엄마는 어땠을까. 딸의 온갖 감정의 배설을 눈물로 받아내며 끝까지 곁을 지키는 일. 몇 번씩 쓰러져 병원에 누워있는 딸을 바라보는 일. 무엇이 그녀를 가능케 했을까.




얼마 전 외삼촌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옛 사진을 복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정집 거실장에 나란히 놓인 사진에 대한 내 궁금증으로 엄마는 추억여행을 떠났다. 아버지가 자주 사주셨던 이성당 빵 이야기. 명절이면 온 가족이 시내에 나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 그리고 집 전화번호 747.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영희야! 너도 콩나물 대가리를 볼 줄 아느냐?” 엄마에게 피아노를 사 주겠다 약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뒤이어 할머니마저 엄마의 곁을 떠났다. 9남매 중 딸들을 귀하게 여겼던 할아버지. 만약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서울 소재의 여대 입시에 떨어진 엄마가 끝까지 재수를 이어갔다면. 엄마의 오늘은 달라졌을까.





그날 저녁, 내 머릿속에서 어린날의 엄마가 뛰어다녔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빵집에 들어가는 엄마. 집으로 걸려온 할아버지의 전화에 환하게 웃는 엄마 얼굴. 오빠들의 손을 잡고 시내 구경을 나가는 엄마의 웃음소리. 잔디밭에서 친구와 함께 등을 기대고 있는 사진 속 여고생 엄마. 그런 엄마가 747 집 전화번호를 수없이 누르며 울고 있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엄마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얼마나 간절히 원해왔을까. 어떻게 많은 날들을 홀로 아팠을까.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다.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과 닮았다고. 나를 향한 사랑이 끓고 애가 끓고 눈물이 끓을 수밖에 없는 주전자. 그 안에 나를 담고 끝없는 사랑으로 끓어올라 나를 따뜻하게 때론 뜨겁게 보호해 준 모습으로 오래 닳아 언젠가 구멍이 뚫리고 낡아져 거무스름한 그을음만 남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언젠가는 주전자를 바꿀 수 없다고 버릴 수 없다고 주전자를 끌어안고 회한의 눈물로 그 안을 가득 채우겠지.





엄마가 견뎌온 외로움과 부담감. 그 무게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식을 향한 사랑 앞에 무력하지 않았던 엄마. 그동안 버텨온 시간들.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지 않기를 바란다. 버텨야  했던 고단한 삶. 이제는 이 삶을 살아가 주기를.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엄마도 결국 사랑받았던 귀한 딸이었기에. 엄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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