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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Oct 21. 2020

사랑이라는 말 밖에

그저 사랑이라고



그녀가 탄 거친 풍랑의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언제 침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찢어진 돛 하나에 의지하며 가고 있는 그녀 험한 여정에 한 남자가 올라탔다. 그녀는 배안의 부속물들을 집어던지며 타지 말라고 그의 손을 여러 번 생채기 냈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허리에 그녀를 더욱 꽉 동여맸다. 거친 파도가 그녀를 삼키려 했다. 그녀는 휩쓸리지 않았다. 눈을 뜨니 그가 온몸으로 그녀를 지켜내고 있었다.



“누나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양귀비꽃을 찍으러 부안으로 출사를 가던 날 그가 내게 말했다. 그가 내게 소개팅을 주선해 준 게 이번이 두 번째다. 자동차 동호회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형에 이어 이번엔 수영장에서 알고 지내는 형을 소개해줬다. “신경 써서 해 줬는데 잘 안 되니까 미안해서 그렇지.” 연이어 어긋나는 상황이 나는 미안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는 내게 말했다. “후회했어요. 누나를 왜 다른 사람한테 소개했는지.”



“누나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그의 친구가 물었다. "멀리서 찾지 마세요.” 친구가 이야기하는 내내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초조한 얼굴이었다. 눈에 훤히 다 보이는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웃기만 했다. 한 오빠는 물었다. “만나기만 하면 네가 마음 안 받아준다고 죽상이야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평생 가발을 쓴 채로 살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은 후였다.



“같이 치료하면 되잖아요. 치료 잘 받으면 나을 수도 있잖아요.”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의 말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라 왔지만 5년째 이 모양이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치료를 가던 날 그는 내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 사실 누군가와 함께 병원에 간다는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답답하고 막연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를 명동 한복판에 세워뒀다.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다가 보고 싶어.”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는 근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차를 돌렸다. 여느 날과 다르게 말도 없고 웃지 않는 내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스름한 하늘을 뒤로하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고개를 떨궜다. 그는 말없이 내 어깨와 차갑게 식어버린 눈물을 만져줄 뿐이었다. 나는 떨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랑도 곧 끝날 거라고.



이런 나를 이제 그만 떠나도 좋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나를 그래도 사랑할 수 있겠니. 뭐가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쯤에서 그를 놓아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내 배에 그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수 없이 외친 말을 그는 들었을까. 그가 듣기를 바랐다. 한때 치기 어린 사랑이겠지 싶다가도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는 내 간절함 외침을.



“삶의 끝자락에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할게.” 그는 내게 청혼했다. 나는 결심했다. 나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그를 위해 내 모든 아픔까지 사랑한 그를 위해 살겠다고. 고된 나를 기꺼이 택한 그의 사랑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심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의 사랑은 한 치의 거짓이 없었음을.




불안했던 내 삶을 이해해준 단 한 사람. 언젠가는 그에게 고백하리라. 당신과 함께 한 삶의 여정이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리라. 우리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내게 단 하루라도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그때가 오면 나는 당신을 꼭 안아주리라. 나도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고.




우리는 8년째 순항 중이다. 거센 풍랑도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기도 했지만 항해 중 발견한 두 개의 보물 상자와 함께 우리의 배는 더욱 단단해져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항로를 알 수 없는 인생에 어떤 계절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확신한다. 우리에게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는 함께할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로 그는 나에게로 박혀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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