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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Nov 06. 2020

상실의 무게



몸이 아프다.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 말할 수 없지만 몸은 내게 아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날 저녁, 내 몸에 가득했던 뭔가가 힘없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붙잡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 안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피아노에 대한 갈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 움직이다 이내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선생님 혹시 수강 자리가 남아 있나요?” 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동네 문화카페 피아노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다. 선생님은 수준에 맞춰 개인별로 지도해 주실 거라고 했다. 첫 수업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두근거렸다. 피아노 학원에 들어서자 맑은 도어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도 함께 뛰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연주할 수 있을만한 여러 종류의 악보를 준비해 주셨다. 주춤거리는 마음과 어느새 굳어버린 손은 생각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이 곡은 양오 씨가 충분히 연주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날 보고 웃었다. 두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연습했다.  첫 수업을 마친 그날 나는 몸살을 앓았다.



수업의 회차가 지날수록 내 손은 점점 풀려가고 있었다. 선생님께 레슨을 받을 때면 여전히 긴장했지만 선생님의 격려에 내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선생님, 저는 코드를 정확히는 잘 몰라요.” 솔직하게 말했다. “그동안 어떻게 연주했어요?” 그랬다. 나는 재능은 없었지만 열정은 있었다. 남들이 하는 연주를 눈대중으로 듣는 귀로 배워 나는 반주를 어설프게 독학했다.




피아노 수업하는 날은 늘 기다려졌다. 주 1회 2시간. 오늘은 또 어떤 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 기대했고 주어진 시간 내내 계속 연습했다. 수업을 마치고 출근 시간이 다가  매번 점심을 거르는 때가 많았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그날 주어진 한 곡을 연주하게 되면 그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코로나 19로 동네 문화카페 수업은 여러 번의 연기와 재개를 반복했다. 드디어 마지막 수업일이 되었다. 그 마지막이 내게 이토록 무게감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선생님은 내가 연주하면 좋을 악보를 몇 곡 챙겨주셨다. 더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선생님의 바쁜 발걸음이 느껴졌다. 아쉬웠던 걸까. 나는 주어진 시간을 초과해 연습하고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양오 씨는 너무 아까워요.” 선생님의 말에 하마터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참았다. 사실 좋았다.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허무하게 묻혀버린 지난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피아노에 대한 내 사랑만큼은 묻혀있지 않은 것 같아서 고마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또 마지막이라는 시간이 다가온 것에 대해.



피아노 전공자들처럼 특별한 재능이나 뛰어난 실력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피아노를 좋아했을 뿐이고 특별히 사랑했고 마음 깊이 그리워했다. 내게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늘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내 몸을 한참 덮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가둬놓고 아프게 한다는 걸 눈치챘다. 사랑하고 간절했던 것들에 대한 마지막이 나를 슬프게 하고 있다. 이름조차 아파 외면해왔던 내 그리운 피아노에 대한 갈망. 그리고 다시 불타올라 매달려온 여러 마음들에 대한 아쉬움이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



차를 달려 바라본 가을 햇살이 너무도 눈부셔 나를 아리게 한다. 이 상실감의 무게도 오롯이 견디고 나면 그때는 그 마음도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상실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 내 안에 박혀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오겠지. 상실은 누군가에게는 깊이 박혀 그리워하게 되니까. 계속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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